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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우글거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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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우글거렸으면 좋겠습니다
  • 딴지 USA
  • 승인 2020.09.29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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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교회에서 청년부 부장을 맡은 적이 있다. 누굴 가르치는 일에 자질이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안 하겠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으나 나보다 고집이 훨씬 쎈 전임 부장이 거듭 강권하기에 억지로 맡았다. 맡으면서 전제를 달았다. "청년부 지도 목사가 있으니 나는 바지 노릇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행정 처리하고 간간이 밥값이나 내면서...

연말에 청년부 지도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장님, 도와주십시오. 청년들이 내년도 청년부 운영 방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는데 저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부장직을 맡은 후 처음으로 청년부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안건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나이 많은 청년들이 주도해서 마련한 계획의 요지는 청년부 지도 목사를 '바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청년부를 세 개의 아둘람으로 재편한 후 교회 내의 성인 아둘람들이 하듯이 주일 아침에 청년부 지도 목사가 아니라 담임목사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기들끼리 아둘람 모임을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청년부 지도 목사는 뭘 해야 할까? 행정처리, 쉽게 말해 청년들이 계획한 일을 교회에 보고하고 필요한 예산 타오고 나중에 결산하고 하는 등등의 잡무나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청년들이 하는 발언을 살펴보니 청년부 지도 목사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특히 나이 많은 청년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 계획을 주도했던 청년 회장은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른바 엘리트였다. 나이도 청년부 지도 목사와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청년의 입장에서 보면 지잡대 나와서 작은 교회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부 지도 목사는 교회 밖에서라면 상종도 하지 않을 찌질한 동네 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청년부 목사는 처음부터 그 친구를 비롯한 나이 많은 청년들을 휘어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청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더는 당신에게 배울 게 없다. 그냥 우리끼리 하겠다.

청년들의 토론이 끝나갈 즈음에 부장으로서 발언권을 얻어서 한 마디 했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다. 첫째, 청년부는 교회 조직상 교육부서에 속한다. 니들이 아무리 머리가 컸다고 해도 교회 입장에서 보자면 너희는 여전히 교육의 대상이다. 나이 많은 청년들은 어떨지 몰라도 이제 막 고등부 마치고 청년부에 올라온 얘들은 말 그대로 아직 핏덩어리들이다. 그러니 나이 먹은 너희들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더 이상 교육이 필요 없다고 여긴다면 청년부를 떠나서 성인 아둘람으로 가라. 니들 나이 때 결혼해서 이미 성인 아둘람에 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 꽤 있다. 그러니 청년부에 소속된 상태로 성인 아둘람처럼 지내려고 하지 마라. 둘째, 교회는 청년과 학생들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다. 미래의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도 교회의 몫이다. 그래서 조금 부족한 것이 있어도 젊은 목사들에게 학생들을 지도할 기회를 부여해 훈련을 시킨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온전한 목회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교회가 젊은 목회자를 훈련시키는 기회를 너희가 빼앗아서는 안 된다."

민주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우리 교회에서는 모든 게 투표로 결정된다. 부장이 한 마디 했다고 그게 결론이 되지 않는다. 하기야 민주적이니까 청년들이 되든 안 되든 그런 발칙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인지 뭔지, 나이 많은 청년들이 주도했던 새로운 청년부 운영 계획은 투표를 통해 부결되었다. 빅마우스 선배들의 기세에 눌려 자기 뜻을 밝히기 어려워했던 어린 청년들이 얌전하게 '아니오'에 표를 던졌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한 말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내 말이 없었더라도 청년들 중에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하던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과는 그렇게 나왔다. 새로운 운영 계획 부결.

연말에 교회는 청년부를 지도하던 목사를 유초등부로 발령냈다. 어차피 그런 리더십으로 청년부를 지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화력과 지도력을 모두 갖춘 중고등부 담당 목사를 청년부로 보냈다. 그 계획을 주도했던 청년들 중 몇은 이듬해에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그 청년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목사 역시 1년 후에 교회를, 아니 목회직 자체를 떠났다. 나는 어찌 됐느냐고? 그 회의 직후에 부장직에 대한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나는 나이 많은 청년들의 계획의 무모함과 논리적 헛점은 아주 분명하게 파악했으나 그런 계획을 내놓을 만큼 절실했던 그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청년 교육을 입에 담을 만한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딱 1년만에 부장직을 그만 뒀다. 지금 청년부는 청년들과 잘 어울리고 소통하는 젊은 집사님이 부장직을 맡아 잘 운영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늘 시끄럽다. 특히 청년들은 역사 기간 내내 불온하고 무모하고 때로는 한심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그런 불온, 무모, 한심함 때문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가 늘 옳은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변화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늘 무덤 속처럼 고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덤 속의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내가 합똥 총회가 양로원이 되어가는 것을 비판하며 대조적으로 우리나라 정당들이 젊은 피 수혈에 힘쓰고 있음을 지적하자 몇 분이 우리 나라 청년들의 한심함을 지적하셨다. 젊은 애들도 별 거 없다는 거였다. 의문이 들었다. 별 거 없으면 어쩌자는 건가? 이 양로원 체제를 계속 이어가는 게 옳다는 건가? 나는 청년들과 잘 어울리는 쪽은 '결코' 아니지만, 애들이 나를 피하기 전에 내가 먼저 피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 내가 청년 때 그랬던 것처럼, 젊은이들이 우글거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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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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