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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런 인간과 공동체를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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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런 인간과 공동체를 할 수 있어?"
  • 딴지 USA
  • 승인 2022.05.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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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그의 배우자)가 된다는 것은.

복음의 선포자.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 회중을 예배로 인도하는 사람. 등등의 영광스러운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년에 절반 쯤의 시간은 불특정 다수의 중상모략과 색안경 낀 시선을 견뎌내야 하며, 별다른 잘못 없이 힐난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하며,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설마? 그렇게까지?' 나도 이런 표현이 과장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실이다.

목사님, 사모님(사부님?)들이 착해서 말을 잘 안 하는 것이다. 그러다 속병 들어서 부부 관계 파탄 나고, 성격 이상해지고, 몰래 성, 돈, 권력 등을 추구하게 되기도 한다. (힘들어서 그렇게 됐으니 그래도 된다는 합리화는 아니다.)

천사들만 모이는 교회는 없고, 인간적인 술수를 쓰지 않으려 할수록 저항은 거세다. 인원이 많든 적든 이런 문제는 늘 있다.

'목회자 네가 부족한 것을 괜히 성도 탓, 환경 탓 하는 것 아니냐?' 스스로에게 수천 수만 번을 묻는다. 그러나 "제가 부족해서요."라고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말하는 것은 정확한 진단을 방해할 뿐더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태도이다. 진짜 부족한 거면 주님께 관둔다고 말하든지. (먼저 관두라고 하지 않으시면 그냥 봐 주고 계시는 것이니 힘들어도 잘 해나가 보자.)

목회 현장에서 경험한 바,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실 그게 뭔지 경험해 (그런 교회를 다녀) 보지도 않았고, 사실은 서로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세우려는 그런 교회(?)를 다녀 본 적도, 세워 본 적도 없다. (이건 5년 쯤 됐을 때 깨달음. 처음에는 내가 세울 줄 안다고 착각.)

"어떻게 저런 인간과 공동체를 할 수 있어?"라고 (서로)생각할 만한 사건 사고들이 공동체 안에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안해도 별로 지장 없는 일을 고집부리고 목숨 걸고 하다가 서로 싸우고 원한을 맺고, 탓하고 원수 맺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어떻게 그 지점에서 싸움이 일어날 수가 있어? 일부러 싸우려고 해도 어렵겠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퀴리에 엘레이숑.

서로 전혀 상관 없이 피상적인 관계에 익숙하고, 실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나머지 관계는 전부 적당히 하는 것을 교회 안팎에서 학습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데는 수많은 현실적인 장애물들이 있다. (이미 받아들여 주셨다는데 잘 안 믿는다. 사실. 아니면 나랑 나와 친한 애만 받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다.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개인적 차원에서는 받아들여서 제법 고마워 하지만, 거기까지. 문제는 이것을 공동체적으로는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 있다. 개인 구원과 회심에 국한된 신앙에서 공동체적 삶과 그로 인한 균형 있는 성숙으로 나아가는 데는 아직도 험산준령이 놓여 있다.

그래서 옛날 선배 목사님들은 "성도랑 친해지지도 말고, 성도를 가르치지도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인원이 많을 경우) 1~2년에 한번씩 재편성하고 돌려서 서로 너무 친해지게 만들지도 말라(친해지면 싸우니까). 그저 설교나 기가 막히게 잘 해서 아무도 찍소리 못하게 하라."는 암묵적인 율법을 따라 목회를 하시기도 했다.

아직 덜 데어 본(?) 신학생 후배들은 선배들의 저런 방침에 "썩었다." "목회를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가." 할지도 모르지만, 이 바닥의 쓴 맛(?)을 좀 본 나 같이 어정쩡한 사람은 저런 방식을 점점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늘 유혹도 있다. 진실한 공동체를 별로 원하지 않는 (일부) 성도들을 볼 때, 복음을 거절(하고 외면해 주기라도 하면 차라리 감사.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거짓과 모략으로 공격)하는 행위들을 볼 때, 목회자는 뭐든지 자꾸 적당히 하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기도원도 가 보고, 금식도 해 보지만, 로뎀 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나는 내 선배들보다 낫지 못합니다. 나를 죽여 주소서."라는 상태로 쓰러져 있을 때가 일년 중 25주 정도쯤은 된다. 그러면서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프로니까. 성도들이 전부 그런 건 아니니까. 내게 부족함이 있으니까." 등등의 말로 자신을 설득하고 주님께 매달려 하루 하루의 삶을 또 살아 가야 한다.

목회자(부부)들 중에 우울증, 공황 장애 등을 겪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이유는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그래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은 "나 사모랑 한판 붙었으니 오늘 설교 못해! 최 목사 네가 해!"라고 하실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최홍준 목사님 간증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근데 그것도 큰 교회나 되니까 그렇게 하시는 거ㅈ... 퍽. 여기까지.

이런 상황을 제법 긴 기간 겪어오다 보니, 이제 갓 목회를 시작했거나, 비교적 돌이 많은 척박한 밭을 받은 형제자매들에게 해줄 말이 생겨서 몇 자 적어 본다. 전만큼 힘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심장이 쪼여 오고 숨이 차서 나도 숨 쉴 틈이 필요하기도 하고.

- 잽이 자꾸 날아올 때 괜찮은 척 하지 말고, 아프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쉬자. 쌓이면 펀치 드렁크로 아예 링에 못 올라가게 될 수도 있다.

- 과도하게 방어적이 되지 않기 위해 일만 하지 말고 가족과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자.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데도 갈 데가 없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 교회 안의 리더들과 복음 안에서 진실한 관계, 좋은 기억을 쌓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자. 훈련되지 않아서 문제라면 일단 자주 만나기라도 하자. 한번 고독한 늑대 이미지가 생기면 "목사님 바쁘시니까"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

- 말도 안되는 걸로 억울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 한 사람 때문에 나머지 모든 사람(과 공동체 전체)을 미워하지 않게 되도록 객관성을 유지하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말자.

- 교회 일이라는 게 하려고 하면 끝이 없고, 안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돌아가기는 한다. 그러니 무슨 당장 내일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크고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오늘 다 이루려고 너무 힘쓰지 말자. 물론 대충 하지도 말자.

-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내 잘못 아닌데요?'가 기본 스탠스가 되면, 현실 왜곡 내지는 기억 및 여론 조작 등의 스킬을 언제든 구사할 수 있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 솔직히 내가 부족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겸손하게 보이기 위해 그런 말을 하지 말자. 진짜 부족해서 그런 거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거나 누구에게 가서 배우거나 내가 잘못한 사람을 만나서 용서를 구하거나 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도 않는다. (부족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지 못하는?)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은 무기력과 악순환의 무한 루프로 가는 문이다. 잊지 말자. 게으름(김남준 목사님)이라는 책은 게으른 사람들이 사서 10만 부 이상이 팔렸지만 게을러서 대부분 못 읽는 책이다.

계속 쓰다가 밤 샐 것 같아서 여기서 끝. 이제 새벽 기도 녹화 시작. 마지막 팁은, 독이 찼을 때는 무슨 수를 쓰든 독을 좀 빼고 설교하러 가는 것이 좋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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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병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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