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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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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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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05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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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호 성서해석, 어디까지 해봤나요?]

지금 한국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 갱신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핵심과제 중 하나인 ‘목회자-평신도 이원 구조’는 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의존성, 교인들을 말씀에 따라 사는 주체적 신자로 세우지 못하는 상황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핵심 문제입니다.

교회 부패의 대다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70년대에 교회는 그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목회자-평신도 이원 구조가 있었을지라도, 목회자들이 복음 외의 것에 집착하다가 그것을 자녀에게 세습하고자 하는 시도는 적었습니다. 다들 가난했고 목회자는 비교적 순수했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자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정치와 결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회자-평신도 이원 구조는 유지된 채, 이 위에 복음 외의 것들이 쌓이고 정치와 결탁하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이를 지키고자 세습과 불법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이제 교회의 행태에 너무 지쳐서 식상해진 신자들 스스로가 교회에 대한 애착의 끈을 놓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새로운 이들이 찾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머물던 이들이 떠나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상은 아닙니다. 교회의 핵심이 목회자가 아닌데 신자들이 목회자에게 실망해 소속 교회를 떠나면서, ‘가나안 성도’가 되거나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기존 교회와 목회자에게 실망하더라도, 교회와 신앙 그 자체까지 부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 사이에 ‘교회=목회자 중심 교회’라는 등식이 굳어있고 목회자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다 보니, 목회자에게 실망하는 순간, 신앙의 기둥이 뿌리째 뽑히는 것입니다. 

평신도교회는 목회자가 없어도 교회가 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아니, 목회자도 평신도와 다름없다는 선포요, 평신도 바깥의 누군가가 있어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좋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쇼핑하는 일을 멈추고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교회를 이루라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의 핵심은 목회자 존재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말씀을 의지해 믿음 가운데 살며 세상의 고통을 해소하는 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곳이면 다 교회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데 다만 목회자가 없어 이를 교회라 부를 수 없다면, 가톨릭의 교회관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가 그런 지경입니다. 그것이 옳지 않음을 드러낼 때가 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자들 사이에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평신도교회를 불온시하다가 그것도 가능한 교회의 형태라는 의식이 서서히 생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평신도들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모습은 교회의 임시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로서 온전한 형태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 로마 지역의 적잖은 교회들이 그랬습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가 그랬고 북한과 중국의 가정교회가 그랬습니다. 임시적이요 불완전한 상태였다가 목회자가 세워지면서 온전한 교회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전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예배 공동체였으니까요.

평신도교회: 제 소견의 옳은 대로 가는 길?

평신도교회를 이루려는 시도는 ‘무교회 운동’이나 ‘가나안 교회’와 다릅니다. 평신도교회는 무교회 운동처럼 구체적인 조직으로서 교회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한 교회 됨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 목회자가 없어도 교회임을 주장하는 모임입니다. 

확신컨대,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를 약화하는 일이 아니라 체질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떠나고자 함이 아니라 더욱더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품고자 함입니다. 목회자를 부정함이 아니라 목회자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재설정하고자 함입니다. 평신도교회에 관한 일부의 걱정처럼, “제 소견의 옳은 대로 가고자 하는 사사시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살아있는 초대교회를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 말씀’이 있고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는 한, 신자와 교회는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며, 사사시대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말씀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성령이 소멸된 시대입니다. 자기 탐욕과 이익을 따라 자기 성을 쌓고 살던 시대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지 늘 돌아봐야 하겠지만, 한국의 일반 교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진리라 믿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진리의 영,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믿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 뜻대로 살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으며 등불처럼 이 시대를 살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뿐 아니라 ‘모범’으로 그를 따르며,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며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3장’도 귀하지만 ‘산상수훈’도 버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전 존재를 던져 예수를 따르고자 합니다. 어찌 사사시대라 말할 수 있습니까?

평신도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을 하면, 한국교회의 잘못된 정치와 권력 문제가 드러날 것입니다. 대조가 되는 기준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이 비교되니까요. 그렇다고 우리가 목회자와의 대결을 통해서 평신도의 권력을 쟁취하는 교회 정치 투쟁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쟁취함이 아니라 버리는 데 있습니다. 교회로서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는 타자 지향성,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함에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우리 속에 성령이 계셔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뜻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병든 것, 무너진 것, 고통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신자 공동체를 통해 드러나 세상이 치유되며, 우는 이들이 웃으며 병든 자들이 치유받는 모습을 보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는 데 걸림돌은 ‘목회자-평신도 이원 구조’ ‘목회자 의존성’입니다. 

얼마 전 누구라고 하면 다 아실 만한 교회 개혁 운동의 대표적 목회자 한 분과 서신 교류를 했습니다. 우리의 이 시도를 말씀드리니 그분은 꼭 필요한 일이라 말씀하시며, “목회자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신자들이 종이나 들러리가 되며, 성도들은 그게 편하고 좋다고 목회자에게 맹종하는 그 자세”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망가트렸다고 개탄하셨습니다. 

한 가지 유념할 점도 있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그 잘못된 질서가 바로 잡혔다고 해서 곧바로 평신도교회들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며, 그 공동체가 타자 지향적 교회로서 굳건히 서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 생각대로 살아가므로 제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평신도교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고 목회자처럼 의지할 만한 존재가 딱히 없다 보니 비바람이 칠 때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동안 자식들의 신앙을 전문 사역자들에게 맡겨서 편했는데 이제 가정교회 혹은 평신도교회를 하려니 자녀의 신앙에 대한 부모의 무한 책임이 더럭 겁도 납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겪은 바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바울이나 베드로 사도가 매주 자기들과 함께하며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지도자는 2-3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는 나그네였고, 변변한 신약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막막한 가운데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기억 속에 있는 주님의 말씀, 사도들이 전달해준 서신을 붙들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로 모이고 전진한 것입니다. 의지할 자 없이 모일 때, 비로소 성령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부르짖을 것이며, 누군가 길을 제시하지 못할 때 성령이 빛으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교회 앞에 ‘평신도’라는 이름을 두려는 까닭

교회 앞에 ‘평신도’를 넣어 ‘평신도교회’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개신교회가 기본적으로 평신도적 속성을 띠고 있음을 부각하려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사제와 평신도’ 계급이라는 가톨릭교회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나선 교회입니다. 사제에게 온갖 신적 권한과 권위를 주고 평신도는 그에 의존적인 존재가 되면서, 중세 가톨릭교회 시절에 평신도는 어리석게 되고 사제는 특권으로 인해 부패하여 교회의 교회 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종교개혁이 시작 되었지요. 

나아가 가톨릭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정치화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예언자적 위치를 회복하고자 나타난 것이 개신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계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과 만인제사장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루터는 옳습니다. 루터의 친구 평신도 교수 필리프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가톨릭 신부들의 절대적 권한인 세례를 예배 시간에 직접 집전했습니다. 역사는 그 모습을 보며 ‘평신도에 의한 세례 집전’이라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도시의 지배자들이나 영주 등 세상 권력과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했지요 국가 및 정치와 연결된 교회, 즉 가톨릭의 ‘국가교회’ 형태를 여전히 벗지 못하고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한계를 갖습니다. 부당한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 둘 모두에 항거해야 했으나, 가톨릭교회와의 생사를 건 싸움 때문이었는지 루터는 정치권력과는 타협했습니다.

루터 등의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지닌 한계를 본 젊은 청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도 귀하지만,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를 본받는 ‘따름’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섰습니다. 가톨릭교회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근세 들어 국가와 교회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가톨릭교회는 중세 때의 ‘교회-정치’ 밀착 구조에서 벗어나 예언자적 위치를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연히 나온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교회 내부적으로 ‘목회자-평신도 이원론’에 눌리고 다른 한편으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특정 정치 세력이나 기득권의 한 축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평신도교회라는 말을 쓰려는 것은 두 가지 핵심 문제가 사실 ‘평신도와 목회자 이중성’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뒤늦게라도 한국에서 온전한 종교개혁이 시작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루터의 종교개혁을 모형으로 그 시절로 회귀하고자 함을 넘어, ‘이신칭의’와 ‘산상수훈’을 함께 붙들었던, 즉 구원과 따름을 통합한 초대교회 계승자들의 삶을 본받고자 함입니다. 

사실 평신도라는 용어를 쓸 때 우리는 다소 불편함을 느낍니다. 신자가 자신을 평신도라 할 때보다 목회자가 평신도라고 우리를 부를 때 그 불편함을 더 느낍니다. ‘평신도’라는 개념은 신자를 깔보거나 목회자와 견주어 그 존재를 낮추어보는 모욕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故 김인수 교수님은 20년 전 〈복음과상황〉에 평신도의 처지를 드러내는 기고에 ‘평신도, 병신도?’라는 제목을 달며 평신도들의 의존적 실상을 신랄하게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평신도라는 용어의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어의 한계는 그것을 알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극복되는 법이지, 사용을 회피하거나 다른 용어를 쓴다고 해서 극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폴 스티븐슨 목사님이 제안한 개념 ‘온성도’가 ‘목회자-평신도’를 넘는 통합적 개념으로 제시되었지만 사용하는 이들이 별로 없어 죽은 용어가 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평신도가 목회자의 들러리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주체임을 확인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회복하는 순간, 이 비루한 용어도 사라질 테지요. 우리는 그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자 자임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다소 불편해도 평신도라는 말을 붙들고자 하며, 나아가 ‘평신도’라는 개념을 영광스러운 표현으로 취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왜 존재하는가? 

평신도로만 교회가 가능하다면, 목회자는 왜 필요한가, 신학 수업과 신학교 입학은 왜 필요한가, 평신도교회는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그런 비판이 따를 수 있습니다. 개혁적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이 부분에서 불편함이 생겨 저희와 거리를 두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지인들 가운데 목회자들이 많아서 오랜 세월을 고민했습니다. 힘겹게 주를 위해 일하는 분들의 기운을 빼지는 않을지 망설임도 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평신도들로 교회가 가능하다는 말은 목회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조직인 이상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조직과 질서가 필요하고 그 속에서 신자들을 대표하는 목회자, 신자들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필요하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배격하는 것은 평신도와 구별되는 구름 위 존재로서의 목회자입니다. ‘주의 종’인 목회자를 ‘주의 백성’인 나머지가 떠받드는 구도 말입니다. 우리가 찬성하는 목회자 위치는 목회자가 교회 회중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전제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들이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며 스스로가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도록 깨우는 일, 신자들이 목회자 없이도 스스로 교회를 이루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바로 서는 일을 돕습니다. 신자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니 신자들이 스스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해석된 말씀을 따라 살 뿐 아니라 그 깨달음을 신자들이 회중 앞에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말씀을 붙들고 설 때 목회자의 설교와 목회 자세도 바뀌겠지요. 

이렇게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님만 의존하는 신자들이 있는 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그렇게 존귀한 자로 키우는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그 인품과 자질에서 일반 신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겠지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을 중심에 세우니 신자들이 깨어날 것이며 교회는 덜 망가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모든 기존 교회들이 이처럼 목회자가 없는 교회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교회 형태는 앞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해도 한국교회 중에서 무척 소수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 형태를 띠고자 하는 목적은, 목회자가 없어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교회가 가능하니,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신자는 누구이며 목회자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은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라는 촉구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과 그에 따르는 비판을 명예롭게 감수하고자 합니다. 

평신도교회가 한국교회에서 갖는 위치와 의미 

평신도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담론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흐름과 존재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목회자가 누구이고 신자가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롭고 복된 해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교회는 퇴행할 것이고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를 옹호하는 자리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목회자가 로만 칼라를 두르고 의식과 예전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며, 회중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자신만이 유일하게 합당한 자격을 가진 존재라 말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이가 오직 목회자층에게 있는 한, 교회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와 목회자라는 이중 구조가 없어지고, 신자들이 직접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또한 공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목회자는 그들을 지도하고 돕는 위치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현재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전망하건대,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이 흐름을 부정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결국 인정하는 상황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회가 이 흐름을 접하고 이 현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며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기존 교회와 목회자의 위치와 의미)을 해석하는 과정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 그러고도 남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는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걸음이며, 또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지금은 목회자들이 경계심을 품을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그분들도 이 현상을 온전하게 해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내다 보며 우리는 이 길을 가고자 합니다. 

※ 평신도교회와 관련된 어떤 궁금함이나 질문도 환영합니다.(noworry8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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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수 대표
평신도들로 구성된 산아래교회에 출석하며 평신도교회들 연합모임과 공부 모임을 섬기고 있다. 평신도교회의 설교문을 모아 《만남》이라는 설교집을 내기도 했다.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해 활동했고, 현재는 (재)교육의봄 공동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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