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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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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관계로
  • 딴지 USA
  • 승인 2023.07.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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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단위 물질을 상상하고 그것을 아톰(Atomos)이라 불렀습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찾아 우주의 궁극을 이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단위 물질이 꽉 들어찬, 질량을 가진 물질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과학은 이 원자의 중심부에 원자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나아가 그 원자핵의 내부에 전자가 운동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구조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원자가 서울시 면적만하고 원자핵은 축구공만하며 전자는 모래알만하다고 합니다. 서울시와 축구공 사이에는 엄청난 공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공과 모래알 사이 또한 엄청난 공백이 있습니다. 비어 있는 공백, 그것이 물질과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세계와 우주는 질량을 가진 물질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음으로 존재한다는 역설이 근대 물리학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입자에 대한 생각에는 ‘존재’라는 관념이 동시에 내재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관념이든 실재든 존재와 비존재로 세상의 구성 원리를 나누어 이해했던 것입니다. 근대의 실존주의철학도 지금 여기에 물리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원자-원자핵-전자의 구조로 바라본 세계의 구성 원리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텅 빈 공간을 초속 2천2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는 전자의 운동이 원자핵을 가능케 하고 그 원자핵이 원자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운동이 원자핵과 관계 맺는 방식은 운동입니다. 이것은 자유운동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운동이며 질서 안에서의 운동입니다. 즉 물질은 입자가 아니라 텅 빈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비물질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장시킨 물리학적 이론이 ‘초끈이론’입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이라는 이론입니다. 구(球) 형태의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끈의 파동이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와 우주가 끈의 파동에 의해 운동하고 구성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이 세계는 존재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 세계는 구성되고 발전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입자물리학이 인간에게 존재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다면 초끈이론은 관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 주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존재를 위해 투쟁합니다. 자기와 다른 타자를 밀어내고 자기 존재 기반을 넓혀 나갑니다. 그래서 존재자들은 세계를 나와 타자를 하나의 입자로 보고 다른 입자들과 경쟁하며 투쟁하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 나타난 입자적 패러다임입니다. 입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만든 세계는 제국이 되고 그 제국의 폭력적 행위를 통해 세상은 병들고 죽어갔습니다.

이런 제국의 폭력 가운데 등장한 것이 성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물질문명이 발달한 갈대아 우르에서 사막으로 불러낸 것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입자와 입자가 부딪쳐서 존재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막은 존재함으로써의 아브라함이 아니라 텅 빈 공간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음으로써의 아브라함으로 전환되는 스페이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존재자들의 투쟁으로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끈이 일으키는 파동처럼 거룩하고 신성한 파동으로 관계맺음을 통해 세상이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과 관계 맺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관계는 입자로 존재하는 내 자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깨뜨리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관계를 위해 입자로서의 하나님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관계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그 관계의 이름을 성서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근거나 자격이 없음에도 용서해주는 그 시혜가 은혜입니다. 은혜는 관계를 위해 한정 없이 퍼부어주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라는 입자적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교회는 존재합니다. 교회 안의 선한 관계가 파동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태풍이 아니라 우리가 불러일으키는 미세하고 조용한 파동입니다. 우리 안에 이 파동이 잠들게 되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존재하고 있는가, 관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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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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