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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새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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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새 차원
  • 딴지 USA
  • 승인 2022.10.1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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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에게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말 중 하나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복음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다(선포하다)’, ‘복음대로’ 등과 같은 관용어들이 등장하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것의 의미나 지향성을 생각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수용합니다. 종소리만 울리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복음이란 말은 조건반사를 일으켜, 사유를 정지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태도라고 오랜 시간 길들여온 결과입니다. 기독교적 가치나 성서에 어긋나는 부조리를 저질러도 그것을 복음이라는 관용구에 갖다 붙이면 다 허용되는 풍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말의 어원은 ‘유앙겔리온’으로 로마의 정치적인 용어였습니다. 전장에서 온 승전보나 황제의 생일, 새 왕의 취임 등의 기쁜 소식을 유앙겔리온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초대교회는 예수의 설교와 그의 부활 사건에 차용한 것입니다(김세윤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로마 황제의 압제하에 있던 유대 상황에서 매우 정치적인 말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닌 새로운 통치자,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가 편만한 나라, 가난한 사람이 굶주리지 않고, 병든 자가 돈 없이 치유 받으며, 계급과 인종, 성별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유앙겔리온)은 제국의 지배질서에 대항하는 정치적 메시지였습니다.

복음은 만민을 향한 구원의 소식이기 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새 나라(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서 영혼이 천국 가는 것보다 일차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평화를 누리는 게 구원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전한 복음의 일차적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2천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빈곤, 군사적 위협, 인종 차별 같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의미를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을 위한 복음, 부자들을 위한 복음, 나와 우리만을 위한 복음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기보다 이 땅에서 편안히 살다가 천국에서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게 신앙의 목적이 돼버렸습니다. 고난 없는 평안과 영원한 안식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교회와 교인들은 일상 가운데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 심보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땅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복음적이며 정치적 문제로 치부해 버립니다. 복음은 정치와 무관하기 때문에 복음의 순수성과 신앙의 순결성을 위해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해온 목사들일수록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것을 봅니다. 대표적으로 복음의 순수성을 교회 이름으로 내세운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안기부의 자금으로 한기총을 설립했고,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또한 복음의 순수성을 떠드는 사람들일수록 선거 때가 되면 보수정당과 그 후보자에게 투표할 것을 직간접적으로 홍보하며 지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치적 보수와 진보의 개념과 정책들을 생각도 해보지 않고 진보에 대해 무조건 좌익, 빨갱이, 사탄으로 몰아붙이며 노골적으로 보수 세력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지한 보수 세력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이 땅의 서민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자신들에게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선거로 뽑아 놓은 지도자가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은 교회를 통해 전해지는 설교나 길거리에서 뿌리는 전도지가 아니라,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실현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복음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선거와 같은 정치적인 제도를 통해 복음에 합당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복음대로 살려면 일차적으로 정의롭고 올바른 정당과 그 후보에게 투표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복음의 지혜입니다.

건강한 정치적 관심과 올바른 정치적 판단, 이것이 우리 시대에 주어진 복음의 새 차원입니다. 복음, 복음, 너무 생각 없이 떠들지 말고 생각 좀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복음인지. 이젠 올바른 선거가 복음의 한 방편이 됐습니다. 투표를 잘못했을 때 일어나는 비복음적인 상황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복음은 전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며, 복음은 말하는 게 아니라 똑바로 투표하는 것입니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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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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