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과연 따로 있을까요?
상태바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과연 따로 있을까요?
  • 딴지 USA
  • 승인 2021.11.12 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지고 다투는 일이 많습니다.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란 뜻입니다.

통일한국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그들과 많은 교제를 나누었지요. 그들도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북한 선교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떻게하면 성경책을 북한에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았습니다. 성경책이 들어가야 내부에서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밀입국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시절 생명을 담보로 성경책 운반을 의뢰했던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을 전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나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식량이나 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국밥 한 그릇은 육의 양식이자 영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옛날 어릴적 가난했던 시절 엄마가 싸주셨던 도시락 기억하나요?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기에 바빴던 그 도시락은 나의 허기를 달랬던 음식이기도 했지만 엄마의 정성이자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도시락 하나가 육의 양식이자 영의 양식이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는 배고픈 자에게 음식으로 일종의 거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땐 세상에 공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그깟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죠.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예배에 나오면 식권과 같은 용돈이 주어지기도 했었으니까요. 탈북자들은 그 돈을 받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성경공부나 예배에 참석하려고 줄을 섰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방법으로 선교지에 사역하는 분들이 많구요. 그만큼 좋은 방법도 없어 보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정말 선교를 위해 부득이한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살 때가 많은거 같습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자가 되어보니 그제서야 그 심정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까지 받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은 못하더라도 뭔가 가치 있는 쓰임은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힘든 시간을 인내로 견뎠습니다.

그런데 나의 지식은, 그 힘들게 받은 박사학위는 한낮 배고픈 자에게는 국밥 한 그릇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적인 교양인인의 모습을 보이려고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고 논해도 결국 그 지식 역시 배고픈 자에게는 국밥 한 그릇보다도 못한 아무 쓸모없는 수다일 뿐입니다.

오래 전 추운 겨울날 중국에서 북한으로 다녀오면서 배웅하러 나왔던 친구들에게 마지막 남은 신발까지도 벗어서 바꿔 신었던 그것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겨울에 그 친구의 여름 단화를 바꾸어 신고 나서야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 그는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동상에 걸릴 뻔 했으니까요.

배를 곯아 허기진 자에게는 영의 양식, 육의 양식이 어디 있나요. 국밥 한 그릇이 곧 육의 양식이고 영의 양식입니다.

북한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탈북자들에게 목숨을 건 밀수품으로 성경을 운반하게 했던 그 시절, 나는 그 돈이면 양식을 보내주는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 차이로 북한선교를 하는 사람들과의 교제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목사가 맞냐 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겁니다. 나는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줘야지 무슨 성경을 주냐고 맞섰으니까요. 나는 노가다로 모은 돈으로 식량을 보내거나 돈을 보내는 일을 했고 그들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성경 반입을 밀수꾼들에게 의뢰하고 있었습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배고픈 자에게 국밥 한 그릇은 삶의 마지막 한끼가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생명줄 입니다. 국밥 한 그릇도 대접 안하면서 배고픈 자에게 그래도 영의 양식을 찾아야 한다며 가르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 폭력이라고 봅니다. 배고픈 자를 더 배고프게 만드는, 두 번 죽이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어도 줄 수는 있으나 주는 것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산제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 제단에 드렸던 것은 제물(물질)이었습니다. 영의 양식만 드려도 된다고 했으면 두루마기인 하나님의 말씀만 올려놓았겠죠.

제단에 드려진 제물은 단지 가축의 고기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이 담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드려진 제물은 가난한 자와 레위인들의 일용한 양식이었구요. 어찌보면 하나님은 신앙을 통해서 가진 자와 가난한 자를 다 구원했던 것입니다.

가진 자는 그의 소유인 물질을 드림으로 자신의 영혼도 구원받았고 가난한 자는 일용할 양식을 얻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 배고픈 자들이 실제적으로 먹었던 음식, 그 일용한 양식은 변질되어 오늘날 영적인 의미로만 제한되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성경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는 의미로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삼시세끼 음식 걱정 없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가난한 자에게 일용한 양식은 그저 삼시세끼인데 말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국밥 한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은 그냥 예의상 할 뿐 사랑을 말(언어) 속에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돈을 보내든 상품권을 보내든 쿠폰을 보내든 반찬을 보내든 쿠키를 보내든, 무언가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는 이유는 물질에 마음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담는 그릇은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삼시세끼 걱정 없는 이들에게는 공허한 마음을 채워야 하는 뭔가를 찾기 위해 각종 취미, 문화생활, 여행, 성경묵상과 같은 영의 양식만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배고픈 자에게 양식은 그저 양식입니다.

그 속에 영과 육이 다 담겼기에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대접 받은 그 국밥 한 그릇을 통해 허기진 배도 채우고 사랑도 느끼는 것입니다. 물질이 세속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 이유입니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가기

이범의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 /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