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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귀신이 날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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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귀신이 날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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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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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대면한 귀신들은 기를 펴지 못한다. 예수가 누군지 귀신 같이 알아보기 때문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들이 예수만 만나면 절절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그들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온 귀신 축출 기사들은 귀신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기사들에 사용된 문학적 기술들을 보면 거기에 함의된 사회적 맥락을 읽을 수 있다.

귀신은 단순히 사람의 내면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고통과 환란을 가져오는, 영적인 존재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 귀신들은 복음서 저자의 문학적 기법을 통해 사회학적 의미를 동시에 함의한다. 귀신은 사람을 못살게 구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이며 제국의 압제에 대한 상징으로 읽혀지도록 편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처드 호슬리는 복음서의 사회학적 맥락을 탁월하게 해석해낸, 훌륭한 신학자다.

그에게 귀신은 제국의 폭력적 억압 질서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 선포는 귀신 축출을 통해 제국의 질서에 대항하여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특히 사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는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 마가 공동체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사람을 병들게 하고 혼란과 무질서하게 만드는 폭압적 구조였기 때문에 예수의 기적 기사를 읽는 공동체에 위로와 구원의 확신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치유와 회복의 여정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이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 치유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이나 정신과적 질병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개인이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 신비체험을 통해 치유된다고 믿어왔다. 이것이 그동안 보수적인 교회들이 가진 신앙 패러다임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초월적 신비나 영적인 능력으로만 사람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먼저 이해했다.

예수는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를 보고 소외자의 우울증 징후를 단박에 알아챘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역시 인격적으로 건강한 자아를 갖지 못한 자폐적 인간임을 꿰뚫어보았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가 파괴된 데서 오는 정신과적 질병을 안고 있었다. 또한 마가는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귀신의 이름을 ‘군대(레기온)’이라고 명명한다.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의 정체가 로마 군대라고 말하는 것은 로마의 식민지였던 당대 팔레스틴에서 매우 위험한 정치적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원인이 제국의 폭력적 지배 구조 때문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마가는 예수를 통해 질병과 귀신들림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단을 의학에서는 사회역학이라고 한다. ‘역학(疫學)’은 집단 내에서 질병과 감염의 상태나 변동을 연구하며 원인을 추적하는 의학 분야다. 전통적으로 역학조사는 질병 원인자의 감염 경로를 개인 간의 접촉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최근에 와서는 그것의 사회적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그것이 바로 공중보건학이다.

김승섭이라는 보건의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살아온 내력을 저술한 책이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다. 달달한 에세이집 같은 제목과는 다르게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그가 전투적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의사가 썼지만 의학 서적이 아니라 하나의 에세이집이다. 그가 연구하고 참여했던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질병 상태와 그것의 원인들을 그는 에세이로 써나갔다. 하지만 이 책은 하나의 역사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질병과 귀신들림의 원인이 당대의 폭압적 지배구조에 있다고 보았던 마가와, 또 그것을 읽어낸 리처드 호슬리 같은 신학자를 떠올렸다.

질병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아픔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그의 회복을 위해 푸닥거리하듯 기도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질병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 신학의 흐름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유주의신학이라는 마녀의 꼬리표를 달고 추방당하기 일쑤였다.

윤석열 정부가 새해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부자들의 세금을 줄인 결과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다.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 부자들의 주머니에 넣어준 꼴이다. 저소득층과 노인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청년들이 입을 상처가 벌써 아프다. 귀신에 붙잡힌 듯 정신없이 자기를 혹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 더 가혹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교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바이러스가 되고 귀신이 되어 우리의 형제들을 병들게 하고 귀신처럼 끌고 다닐 때, ‘열심히 기도하라, 주님이 도와주신다’고만 말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교회는 바이러스와 귀신의 숙주일 뿐이다. 교회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귀신이 날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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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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