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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의 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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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의 개들
  • 딴지 USA
  • 승인 2022.02.2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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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시돈은 고대 페니키아의 상업 도시였다. 그 덕분에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같은 제국의 침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호전적인 기질로 주변의 약소국들에 대한 침탈을 일삼았다. 이스라엘도 그 침탈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페니키아와 우호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외교적인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가장 손쉽게 외교적인 관계를 풀어가는 방법이 왕가와 왕가 사이의 정략결혼이었다.

솔로몬이 시돈의 공주와 결혼한 것은 바로 이런 정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한 것도 이런 정략적 차원에서였다. 하지만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이스라엘의 분열로 나타났고, 아합의 정략결혼은 온 나라에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앙을 퍼뜨리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사회의 종교는 정치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시돈의 공주들에 의해 유입된 종교는 이스라엘 정치를 오염시키기에 충분했다.

 

시돈은 해상과 육상이 만나는, 고도로 발달한 무역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는 대부분 물질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재물신을 섬기는 샤먼 종교가 대세를 이룬다. 시돈의 주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아세라)은 풍요와 재물의 신들이었다. 아스다롯은 주신인 바알의 아내인 여신이었는데, 바알과 함께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에는 난잡한 그룹섹스가 행해졌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페니키아의 이러한 종교 행태를 ‘신성한 매춘’으로 묘사한다. 아스다롯의 신전에는 신전 창기들이 다산과 풍요를 위한 종교적 매춘을 합법적으로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신과 여신인 바알과 아스다롯 상(像) 사이에서 교접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보고 발정하여 성관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축의 다산과 곡물의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바알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물신은 동류 인간에 대한 공감이나 사회적 정의 같은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물을 얻고 다산과 풍요를 누리는 데 있다. 그러므로 과정에 대한 절차적 공정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시킨다. 이것이 재물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다. 나에게 돈이 되고 이익을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재물신을 섬기는 자들의 위험성이다.

 

아합 왕의 왕비였던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공주였다. 엣바알은 바알의 사제라는 뜻이다. 바알의 사제였던 그가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장악한 것이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는, 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짓밟고 파괴해버리 게 재물신의 속성이다. 아니, 재물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이세벨이 악명 높았던 것은 단순히 그가 바알 신앙을 퍼뜨린 데 있는 게 아니라 재물신을 섬기는 자들의 이기적이고 포악한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데 있다. 그 한 사례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악한 왕비가 선량한 백성의 재산을 불법으로 탈취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이 충돌한 사건이다. 아합 왕이 자기 왕궁 앞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나서 거래를 요구한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백성과의 정당한 거래는 이스라엘 사회가, 아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한 공의다. 하지만 나봇은 율법에 따라 조상이 물려준 땅을 돈 받고 팔 수 없다며 거절한다. 토지를 매매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율법은 사회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토지가 매매 수단이 되는 순간,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토지가 독점되고,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한 바다.

그러므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율법 전통을 나봇은 충실히 지키려 했던 것이고, 아합은 그것을 탐내었지만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해였고 사회적 합의였다. 하지만 이세벨은 재물신의 사제답게 위증자를 내세워 재판을 열고 조작된 판결을 내려 나봇을 사형시켜버린다. 그리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남편에게 준다. 하나님의 공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탐욕과 이기심, 거짓과 폭력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모습이 이세벨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이세벨의 거짓과 폭력에 침묵하며 동조한 장로들과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버리고 이세벨의 개가 됐던 것이다. 거짓과 폭력을 써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우상의 이데올로기에 꼬리 흔들며 복종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이세벨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었다.

다산과 풍요는 고대사회나 현대사회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다. 지금도 대통령 후보자들의 캐치프레이즈는 ‘경제 대통령’이다. 교회 장로라는 이명박 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줄 것처럼 호도했다. 그는 스스로 바알과 아세라가 된 것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장로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심지어 이명박을 안 찍으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설교하는 목사도 있었다. 그들은 장로 대통을 지지한 게 아니라 재물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지지했던 것이다.

윤석열과 그의 부인 김건희에게서 나는 아합과 이세벨을 본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 주변에서 꼬리를 흔들며 그들을 핥고 있는, 이세벨의 개들도 함께 본다. 신천지가 윤석열과 동업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도 여전히 윤석열을 지지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신천지가 이단이기 때문에 싫어한 게 아니었다는 걸 반증하는 건 아닌가? 신천지를 혐오했던 것은 자기들의 밥상을 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가.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은 교회 밖의 이단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세벨의 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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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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