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니들이 대신 죽어줘, 당연한 거잖아?
상태바
니들이 대신 죽어줘, 당연한 거잖아?
  • 딴지 USA
  • 승인 2022.03.02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이 가장 위험해질 때가 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질 때다. 암기과목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나 법관이 될 때다.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믿음을 가질 때다. 문해력 없는 사람이 성경을 읽고 목사가 될 때다.

예전에 시골에서 교단목회를 할 때의 일이다. 교단 행사가 있어 여러 목회자들이 승합차에 동승하여 장거리 이동하는 과정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이 피는 차 안의 분위기에 빙충맞은 한 목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평소에도 과격하고 거침없는 정치적 발언으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였다. 때 지난 연평해전 사건을 꺼내며 ‘그 때 김대중이 과감하게 북한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그가 종북이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빨갱이 대통령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차에 동승한 이들은 일변 침묵 모드로 돌아섰다. 그의 말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과 말을 섞어서 괜한 분란을 만드는 게 싫었던 거다.

그의 입에 물려있는 걸레 같은 정치 화두의 결론은 선제타격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북한을 선제타격하여 몰살시켜 버려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듣다 못한 나는 그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 점잖게 한 마디 응수했다. “전쟁나면 우리도 많이 죽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핏대를 세웠다. “전쟁은 원래 그런 거 아녀? 사람 죽는 거 무서워서 전쟁 못하면 안 되지! 그깟 사람 몇 십만 명 죽는 게 대순가?”

기가 찼다. 이 미친 자를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의 못된 생각에 상처를 내고 싶어졌다. 나는 요한계시록의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그의 머리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림언어는 잔인할 정도로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상황이나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비참하게 죽은 몇 십만 명의 중에 당신의 아들과 딸, 그리고 당신의 아내가 포함돼도 괜찮은가요? 포탄에 맞아 사지가 절단되고, 총알이 복부를 관통하여 내장이 쏟아지고, 두개골이 부서져 뇌수가 흩어진 채로 길거리에 널브러진, 그 시체가 당신의 아내와 당신의 아들딸이어도 괜찮은가요? 전쟁이 나면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당신의 아들이 전선으로 징집될텐데, 그래도 괜찮은가요? 그래도 선제타격을 해야 하나요?”

이 미친 자는 그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말을 하지 못하고 증기기관차처럼 스팀을 뻑뻑 내뿜으면서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어이, 김목사, 마,마,마, 말이야! 사상이 의심스러워, 사상이!” 그는 내게 그 말만 반복적으로 던졌다.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던 게다.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다른 차로 바꾸어 탔다.

그 뒤로도 나는 그와 같이 미친 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는 거다. 전쟁이 나더라도 그로 인한 피해로부터 나는 안전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대가로 누군가가 대신 죽어주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가 그들의 무의식에 깔려 있다. 특히 한 번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보지 않은 자들에게서 그러한 무지가 나타난다. 누군가 내 대신 죽어주는 대가로 나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망상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고가 오랫동안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간 것으로 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손쉽게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대속론과 칭의론이 그것이다. 예수가 내 대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으니 나는 그로 인해 죄에서 놓인 의인이 되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교리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이다. 이런 교리는 손쉬운 구원의식을 낳았다. 이런 구원의식은 노력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스턴트 신앙을 양산했다. 인스턴트 신앙은 예수를 따름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으로만 보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 하기보다 따르라고 강조했다. 따르는 것은 행위를 수반한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 하지만 믿음은 심리적 고백만으로 가능하다. 따름보다 쉬운 게 믿음이다. 우리는 너무 쉬운 것만 선택하며 살아왔다.

선제타격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심리의 기저에도 이런 구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니들이 내 대신 죽어줘, 당연한 거잖아?”

선제타결론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자식들에게, 내 대신 죽어딜라는 외침이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가기

By 김선주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 /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