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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죽음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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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죽음보다 아프다
  • 딴지 USA
  • 승인 2021.11.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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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다. 가던 차를 멈추고 길옆에 앉아 참 많이 울었다. 내 마음이 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고 흘렀다. 눈물을 그치고 싶지 않았다. 흐르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 하루에 두 사람의 죽음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픈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이 너무 아팠다. 모처럼 고향에 갔다가 두 사람의 죽음을 만났다.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이권이 아저씨가 죽었단다. 우울증으로 많은 시간 고생한 것 같다. 시골에서 가난한 장애인 부모 만나 배우지도 못하고 죽어라 일만 하던 그는 심성이 너무 착하고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중풍에 쓰러진 형님과 형수의 가출로 철없는 네 조카들 양육까지 떠맡고 동생의 가정 파탄으로 그 조카까지 떠안고 살아야 했다. 시각장애인 아버지 돌보랴 중풍 장애 형님 돌보랴 꼴통짓 하는 다섯 조카들 돌보랴 그는 자신을 볼돌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헛소리 한 번 안 하고 맑고 평안한 얼굴을 하던 사람, 사슴 같은 눈빛을 가진 사람, 빚지면 죽는다는 맘으로 빚 안 지려고 악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조카들이 다 출가하고 난 뒤 오십줄이 돼서야 착한 아낙 만나서 살뜰하게 사는 모습 보며 좋아했는데, 그가 삶을 스스로 버렸단다. 그동안 소리없이 아팠던 거다. 얼마나 아팠을까.

고향 마을에 교회가 느지막이 생겼다. 30여 년 전 내가 그 교회를 찾았을 때 나이 어린 사모님의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알고 보니 갓난아기 분유 값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목사 부부가 세운 그 교회는 산 밑 음지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교회가 폐허가 되어 있다. 차를 멈추고 들어가 보았다. 교회 입구에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는 게 낡아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불탄 흔적이 있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충남 금산 교촌교회, 올해 3월에 화재가 났단다.

 

예배당과 붙어 있는 단칸방에서 지내던 총각 전도사가 불을 피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단다. 폴리스 라인 넘어 들여다 본 교회와 불탄 사택 내부에서 슬픔이 와락 달려들었다. 풀이 우거진 좁은 계단을 젖은 수건처럼 내려오는데 그 계단 끝에 우편함이 있다. 잡다한 우편물이 쌓여 풍상에 젖고 낡아진 채로 방채돼 있다. 망자의 이름으로 아직까지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내 눈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발신인이 <미래신용정보>라는 곳인데 낌새가 이상해서 검색해보니 채권추심회사였다. 아~~

 

가난한 시골교회 목회자가 살아가는 방법이 신용카드나 대출금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뼈저리게 아파온다. 나도 시골 목회하면서 그 생활을 해봐서 안다, 그 삶이 어떤 것인지. 그런데 채권추심회사에서 우편물이 날아들 정도면 갈 데까지 갔다는 얘기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한 목회자의 삶, 그를 죽인 것은 화재가 아니라 교단이라는 불합리한 권력 구조일 수 있다는 데 소름이 돋았다. 나 역시 시골 목회하면서 교단 부담금을 내가 받는 연봉의 30프로 넘게 내야 했던 아픔이 있다. 나의 연간 실질 수령액은 700만 원 남짓인데 교단에 이런 저런 명목으로 내야 하는 부담금은 200~250만 원 정도였다.

그 돈으로 광화문에 빌딩을 짓고 고액 연봉을 받는 상근자들을 두고 감독들의 의전을 챙기고 목사들 해외여행을 한다. 가난한 교인들의 헌금으로 원숭이 밥이나 주고 다니는 여행을 하는 게 교단이 하는 짓이다. 감리사 같은 쥐꼬리만한 직책이라도 하나 맡으면 그게 벼슬인 줄 알고 힘없고 가난한 교회 목회자에게 갑질하는 게 교단이다. 그 전도사는 불타 죽은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죽은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다. 근로소득자도 아니고 종교인 과세 신고를 할 만큼의 소득도 없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었다.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누구

 

인가. 장애인, 저소득층 같은 이들은 그것이 증명되기만 하면 최저생계비 정도는 국가에서 보장을 해 준다. 하지만 소득 증명을 할 수 없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난한 목회자들과 우울증 같이 증명할 수 없는 질병군에 있어 스스로 죽어가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그 아픔을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서진 뼛조각처럼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아프게 움직인다.

길가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들의 죽음이 아픈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그 삶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어떤 삶은 죽음보다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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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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