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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야곱, 그리고 세 개의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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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야곱, 그리고 세 개의 사다리
  • 딴지 USA
  • 승인 2021.12.1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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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항상 나쁜가? 이런 질문은 우매한 질문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시대에는 선한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악한 것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도덕적인 일이 다른 지역에서는 비도덕적인 일이 되기도 한다. 피터 카소비츠 감독의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팬케이크 가게를 운영하던 유태인 제이콥 하임은 게토에 갇혀 하루하루를 희망이 없는 삶을 산다. 그러던 중 독일군 장교의 막사에 들어갔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게 된다. 그는 뉴스를 듣고 나름대로 전쟁의 상황을 예측하여 독일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있다는 해석을 한다.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유태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은밀하게 전한다. 하지만 이 얘기는 게토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나가서 머지않아 연합군이 자기들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낳는다. 그것은 단순히 뉴스로 전해지고 그치지 않고 제이콥이 라디오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그 추측은 제이콥에게 날마다 새로운 뉴스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몰려들게 한다. 제이콥은 자신이 라디오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독일군에게 알려지게 되면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이 추측성 소문을 떨치려 하지만 사람들은 더욱 집요하게 제이콥에게 매달리며 뉴스를 요구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자신에게 라디오가 없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말해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연이어 자살을 한다. 사실로써의 뉴스, 즉 희망이 없는 진실 앞에 그들은 살 소망이 없었던 것이다. 제이콥의 이야기는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에 의미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제이콥은 자기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번복하고 날마다 새로운 거짓 뉴스를 꾸며낸다. 사람들은 안다. 제이콥이 전하는 뉴스가 거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또 그에게 라디오가 없을 수 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제이콥의 거짓말에 희망을 건다. <제이콥의 거짓말>은 정보나 뉴스의 진실성보다 상황에 따라서는 희망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말해준다. 제이콥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희망의 사다리였던 것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야곱의 사다리>다. 주인공 제이콥 싱어는 베트남전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하여 생활하던 중 심각한 경험을 연이어 하게 된다. 귀신이 보이고 누군가 자신을 쫓는 망상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증상만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에서 전세가 불리한 미 국방부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환각제를 개발하여 자국군에 투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정보부가 그들을 추적 감시하였던 것이다. 제이크(제이콥=야곱)를 환각에 빠트린 베트남전의 그 전투는 적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부대 내에서 일어난, 환각제로 인한 자살 테러였던 것이다. 소대원들간에 서로가 서로를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내면에 공격본능을 부추기는 화학 약물을 개발하여 투여한 결과였다. 그 약물 이름이 ‘사다리’였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느낌을 갖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 추락의 순간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내면을 지배할 때 인간의 공격본능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짐승이 될 수 있다. 미 국방성은 불리한 전세를 그렇게라도 바꿔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베트남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제이콥의 거짓말>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야곱(제이콥)은 감금과 학살이라는 나치의 공포 속에서 희망을 심는 일을 한다. 그 희망은 진실과 거짓을 넘어 선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냐 거짓이냐, 과학이냐 신화냐, 다큐냐 드라마냐 등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살아갈 소망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소망을 빼앗아가는 권력구조가 있다면 이는 그 목적이 아무리 대의를 위한 것이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또 한 사람의 야곱인 제이콥 싱어(야곱의 사다리)는 자신이 몸 바쳐 헌신한 국가로부터 그 소망의 사다리에서 추락당하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잔인하게 학살하도록 공격본능을 부추기는 지배 세력의 음모가 그를 치유될 수 없는 죽음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두 사람의 야곱(제이콥)이 등장하는 배경은 전쟁이다. 이차대전과 베트남전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다. 유사한 전쟁 상황에서 희망과 절망이 두 사람의 야곱에 의해 각각 이야기된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서사 구조에서 형제살해의 모티프는 반복되는 주제다. 프로이트는 형제살해의 근원인 부친살해의 기원을 경쟁관계에 있는 우월한 남성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식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인류는 끊임없이 어떤 권위와 힘에 도전하며 경쟁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처할 때 공격본능이 더욱 커진다.

시기심으로 내면의 불안과 공포로 인해 형제를 살해한, 형제살해의 원형은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인간의 폭력적 심성은 가인과 아벨에서 야곱과 에서에게로 유전된다. 에서의 남성성과 야곱의 여성성의 대결, 에서의 격정과 야곱의 서정성의 대결은 장자권의 상속 투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대결에서 패배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 하고 이를 피해 도망가는 야곱의 광야 길은 불안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가 도피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또한 불안과 공포의 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나 로마 신화가 선택하는 서사는 대결과 복수의 비극적 이야기다. 누군가는 패배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승리자는 개가를 부르거나 잠시의 영광 뒤에 오는 비극에 고통당해야 한다.

하지만 야곱의 드라마는 공격본능을 드러내 자신과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성공한 야곱은 형 에서를 향해 고향으로 가는 길에 얍복 강가에 이른다. 형을 위한 많은 선물꾸러미와 식솔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강 이편에 남는다. 그곳이 야곱에겐 죽음과 같은 장소였다. 형 에서의 불타는 복수심과 분노를 예측할 수 없었다. 형의 손에 재산이 강탈당하고 식솔들과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는 얍복 강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형의 성격을 잘 아는 야곱으로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그 불안과 공포를 공격본능으로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공격하여 적대자를 없앰으로 평안을 찾는 게 아니라 두려워 떠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자신을 신 앞에 던져놓았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 많은 재산과 노비를 거느리고 식솔들을 두고 있지만 힘으로 힘과 맞서 싸우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내려놓고 화해하려는 자세로 신 앞에 엎드렸던 것이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사다리가 보인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 그것은 공격본능으로 불안과 공포를 이기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자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거룩한 정신의 세계로 상승하는 계단이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는 서구 신화에 등장하는 부친살해와 형제살해의 모티프를 밟고 용서와 화해의 길, 치유와 회복의 길,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치유의 내러티브다. 이 내러티브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금은 교회들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분이 교회에 전해준 야곱의 사다리는 지금 우리 안에 견고하게 남아 있는가? 대림절 기간에 이 땅의 교회들이 이 질문 앞에 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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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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