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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깡통이 있는 곳에 그대의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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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깡통이 있는 곳에 그대의 마음이 있다
  • 딴지 USA
  • 승인 2022.06.0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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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72학번인 나의 유년을 포동포동 살찌게 한 것은 남양분유 빈 깡통이었다. 당시에 남양분유는 있는 집 자식들이나 먹던 유아식이었다. 남양분유는 엄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수액을 받아먹던 우리네 가난뱅이와는 다른 종족의 식단이었다. 그래서 남양분유 빈 깡통만 손에 넣어도 신세계를 경험하는 일이었다. 잘생긴 우량아 사진이 그려진 깡통 외피와 맑고 깨끗한 은빛을 내는 깡통 속은 유년의 내밀한 마음을 담아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너무 넓지도 않고 너무 깊지도 않아 슬프거나 외로울 때 나 혼자 들어앉아 숨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내 유년은 빈 깡통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다마’라고 불렀다, 자유롭게 굴러가다 부딪치고 멈추는 역학(力學) 장치를. 그것의 순수한 우리말이 ‘구슬’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인으로 살면서도 일본어의 영향 아래 있을 만큼 그 시절은 벌써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구슬 따먹기를 ‘다마치기’라고 했다. 다마치기는 보통 벽치기, 구멍치기, 홀짝이나 쌈치기(아찌 두비 쌈)으로 행해졌다. 벽치기나 구멍치기는 기술을 요하는 놀이였다. 난 손재주가 없고 신체 감각이 둔한 편이었다. 그 대신 직관이 발달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벽치기나 구멍치기 같은 기술을 요하는 놀이는 피하고 쌈치기를 해서 재산을 불렸다.

나의 유리구슬 재테크는 쌈치기를 통해 성공하였다. 남양분유 빈 깡통을 유리구슬로 가득 채우던 날의 기분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깡통을 열면 유리알들이 맑은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응시했다. 또 그것들을 이불 위에 쏟아놓으면 하얗고 포동포동한 아기의 몸을 뽀득뽀득 씻길 때처럼 맑은 소릴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보물상자 때문에 불안이 찾아왔다. 다마치기를 했다가 잃게 되면 깡통에 가득한 재산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찾아온 것이다. 깡통을 가득 채운 그 충만한 느낌을 상실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다마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더 커졌다. 장롱 속에 숨겨둔 그 깡통을 쥐방울 만한 동생들이 몇 개씩 슬쩍 가져가지 않을까, 옷을 꺼내는 엄마의 눈에 띄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지청구나 듣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숨겨놔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외양간 처마에도 올려놓았다. 하지만 암소의 목에 걸린 방울소리가 잠결에 들려올 때마다 구슬 상자가 쏟아지는 환영에 시달려야 했다. 다락 구석에 처박아 놓았지만 밤새 천장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며 찍찍거리는 쥐새끼들 때문에 불안했다. 이것들이 작당을 하고 구슬을 다 갉아먹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밤새 나를 괴롭혔다. 뒤꼍 은밀한 곳에 땅을 파고 묻어보았지만 지렁이나 노래기 같은 것들이 깡통 속에 기어들어 유리구슬 사이사이에 우글거리는 게 상상되었다. 내 보물상자가 옮겨가는 곳마다 내 마음과 생각이 따라다녔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생각이 사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사물에 의해 생각이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무엇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되면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재물을 땅에 쌓아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축복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을 바꾸라는 말이다. 재물에 대한 관점을 ‘하늘’로 상징되는 근원적인 세계,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한 눈’이다. 헬라어 상사의 ‘성하다’는 단어는 하플루스다. ‘순진한’, ‘천진난만한’, ‘단순한’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마음으로 천진난만하게 바라볼 때 열린다는 것이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것은 그로써 삶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를 바라보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눈이 나빠서 그 세계를 보지 못하면 재물만을 보게 되고 재물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파멸에 이른다는 뜻이다.

신앙은 성한 눈을 가지는 것이다. 재물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없어도 행복한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눈을 갖는 게 지혜이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하나님의 뜻)을 보물로 알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을 가질 때 삶의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지지 못해도 존재의 기쁨과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이 기쁨과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 믿으면서 하나님 믿는 척 말이다.

마태복음 6장 19-24절 본문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이 아니라 너의 관점을 바꾸라는 뜻이다.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바뀐 관점에 따라 생명을 던지는 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관점도 안 바뀌었는데 목숨은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 예수 믿기가 그렇게 쉬운가? 예수는 그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친히 그렇게 사셨다. 다시 묻는다. 예수 믿기가 그렇게 쉬운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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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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