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보편성 전의 다양성, 모두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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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 전의 다양성, 모두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 딴지 USA
  • 승인 2021.12.0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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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검열 self-sensorship. "이런 말 해도 되나" 가 거듭 묻게 되는 조직문화. 경영학 가르칠 때 건강치 못한 그룹의 싸인으로 가르쳤었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의사결정으로 결국 쇠락의 길을 가게 된다.

반면. 상대편을 배려하지 않은 개인성 역시 위험하다. 이 얘기에 대해선, 공부할 때 별로 들은 적이 없다. 역시 미국이라는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적 집단성이 개인성을 억누름이 보다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일까?

이래저래 공적으로 얘기하는 자리가 많다. 하고 나면 스스로 묻게 된다. 어느 쪽으로 치우졌던걸까? 지나친 자기검열은 메시지의 독특성을 잃게한다. 상대편의 선택적 인지 selective perception 을 뚫지 못하고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얘기가 된다. 반면, 배려 없는 돌출행동은 공동체에 쓴 뿌리를 남기며 분쟁의 시작이 된다.

최근 들어서 많이 생각하는건. 대중성과 보편성의 포기. 내 얘기를 모든 사람들이 들을만하도록 만들 이유는 없다는거. 함께 교제하고 일할 그룹이 커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마켓 중심의 자본주의 문화는 신앙이라고 가만두지는 않는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도 배가성 multiplication 이라는 이상한 덫으로 가두었다. 사람을 개인성과 관계성 가운데 보지 않고 그 뒤에 있는 마켓으로 가능성을 가늠한다. 제자훈련 프로그램. 프로그램이라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주님이 정말 배가성과 보편성을 염두에 두셨던가? 정말일까? 물론, 그분은 미래에 새로운 제자들이 나올 것을 예상하셨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전략과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자라난, 성령이 주셨던 낙관이었을게다.

교회의 보편성을 제도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인간의 노력은 결국 뷰러크러시, 이단사냥, 세상 권세와의 야합을 통해서 정치 조직으로 타락했다. 종교개혁과 로마교회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개신교 교단의 조직과 문화를 보라? 그 부패함은 싸이즈와 정비례해서 커지는 듯하다.

게다가 더 이상한 일은, 교단성이라는 게토에 갇힘으로, 세계 교회의 보편성과 오히려 담을 쌓게 된다. "우리 교단은 이렇습니다" 라고 퉁치며, 세계적 변화에 귀를 닫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버린다. 보편성 전에 다양성이 있었다. 보편성은 궁극적으로 주께서 하실 일. 주제넘은 짓을 해선 안된다.

모두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고 의도해선 안되겠지만... 동시에 나다움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Spice. 각 사람에게 각 사람의 향이, 각 공동체는 그 나름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 그게 맞다.

복음은 우리를 공동체의 퍼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묶었던 문화와 사회적 기대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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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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