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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강제노역.. 공산당 용서한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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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강제노역.. 공산당 용서한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님 이야기
  • 딴지 USA
  • 승인 2021.10.29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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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총회선교국 조직 하에 30명 정도의 목사님들이 중국교회 탐방을 떠난 적이 있었다. 나는 통역을 맡게 되었고 기독교연합신문사 기자 한 명도 취재를 위해 동행 했다. 그때 우리가 갔던 지역은 대만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중국 샤먼이라는 바닷가 도시였다. 광역시에 버금갈 정도로 꽤 큰 도시였고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샤먼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는 구랑위라는 섬이 있다. 과거 서구의 열강들이 중국 대륙을 침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했던 곳으로 각 나라의 총독 관저가 있다보니 서구의 나라별 건축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섬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보존과 특별 보호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섬에는 삼일당(三一堂, Trinity church)이란 교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1차적으로 방문했던 곳이다.

삼일당은 3천여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었으며 샤먼시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천이핑이라는 분으로 당시 70대 중반에 가까운 고령에 중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몇 안되는 원로 중 한 분이었다. 군인들처럼 매우 짧게 이발을 하신 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분이 직접 우리 일행을 맞는다고 하시니 탐방팀 목사님들이 조금은 긴장하고 또한 흥분돼 있었다. 사실 그분의 커리어 정도면 중국에서는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분 정도면 적어도 수행비서에 고급 세단까지 타고 나와서 우리를 마중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분을 보고는 다들 입이 떡 막혀서 삽시간에 분위기는 고요해졌다. 그냥 남루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샌달 구두(?)에 찜통 더위 날씨가 몹시 덥다며 커다란 부채로 연거푸 부채질하며 우리 일행을 맞은 것이다. 그분은 수행비서도 없었고 우리 일행을 위해 중형 버스를 한 대 가지고 나왔다며 반갑게 맞는 것이었다.

그분 뒤로 젊은 여성이 보이기에 혹시 비서인가 했더니 연로한 아버지가 걱정되어 따라 나온 딸이었다. 천 목사님과 따님의 안내로 교회에 도착하니 다시 한번 놀랐다. 교회 규모는 꽤 컸지만 규모에 비해 의자나 시설은 매우 낙후됐기 때문이다. 에어컨도 없었고 높은 천장 위에 수많은 회전형 선풍기 날개들이 보였다.

그분은 그 교회의 담임이지만 그 교회만 담임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150여개의 가정교회도 대표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오기 힘든 분들은 전부 가정교회 형태로 예배를 드리게 했고 무허가 종교모임은 안된다며 정부의 단속이 나올 때는 삼일당 교회의 교인인데 그냥 지교회처럼 거리가 멀어서 예배를 드릴 뿐이라 말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삼일당은 정부에서 공인된 교회였고 그 외 수많은 가정교회의 우산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그분이 커버하는 교인들은 족히 수만 명은 넘었다. 한국교회로 치면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다. 그럼에도 그분은 누구나 입는 반팔셔츠에 수행비서 하나 없이(안데려 온게 아니고 비서나 비서실 자체가 없다) 본인이 우리를 하나하나 안내하셨고 그 외 인근 한두 시간 거리의 가정교회 방문까지도 동행해 주셨다.

우리 탐방팀 목사님들 중 여러 분들이 계속해서 조용히 내게 물어왔다. 믿기지 않는다며 이게 가능하냐고 말이다. 목사님들도 직접 보고 계시지 않냐고 말씀드렸다. 며칠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도 목사님들은 그분의 검소한 삶과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이라는 이미지가 매칭이 잘 안됐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라는 거다.

그분의 일대기를 듣고는 더더욱 놀랐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에게 중국 정부에 의해 인정된 일명 삼자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그 천 목사님이란 분도 중국 삼자교회를 대표하는 원로 중 한분이시기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는 다들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그분은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구속되어 20년이나 강제노역 생활을 했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이 돼서야 석방되어 복권되었다. 어쩌다가 구속되었냐고 물었다. 22살의 나이에 당시 베이징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샤먼시교회로 돌아왔다. 그때가 1950년대 초였으니 신중국을 건립한 공산당 정부는 겉으로는 각계 각층의 의견수렴을 한다고 했다. 제약없이 허심탄회하게 말하면 다 수용하겠다며 발언권을 주었다고 한다.

 

철없고 혈기왕성했던 22세의 전도사였던 그는 공산당이 어떤 발언을 해도 겸허히 경청하겠다고 하니 손들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공산당이 이곳을 점령할 때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 등 제직 여러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대놓고 따진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조용히 끌려가게 되었고 도로, 철도 등 건설현장에 강제노역으로 끌려다녔고 20년이 넘어서야 석방된 것이다. 통역을 하면서 나는 그분에게 물었다. 공산당 때문에 인생의 반을 잃었고 거기에 청춘까지 잃으셨다. 온갖 고초를 안겨준 공산당을 증오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중국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으셨냐고 말이다.

노역장에서 그 큰 돌들을 깨고 어깨로 지고 나르면서 정말 하나님을 많이 원망하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자신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냐고 말이다. 그로 인해 결혼을 약속했던 사랑하는 여성과도 생이별하게 된 것이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풀려나서 고향교회로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을 용서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는 일이 없는거 아니냐. 나를 가둔 것은 공산당이었지만 자신은 그 위에 계신 더 크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아무리 힘이 세도 하나님보다 세겠냐고 하시는 거다.

공산당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고 모두 공산당 통치하에 있는 중국을 떠난다면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교회를 다닐 수 있겠는가. 겉으로는 공산당 정부의 통치를 인정하고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해도 목회자로서,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돌봐야 할 가정교회도 많고 새롭게 세워야 할 가정교회도 많다.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사역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하튼 당시 그 목사님의 검소함이 두고두고 탐방팀 목사님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정작 그 목사님은 이게 무슨 검소함이냐, 그냥 여기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있는 그대로의 가감 없는 삶을 사는 것도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겐 참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탐방이었다. 우리와 같은 목사님을 바라는 성도님들의 기대가 그리 큰 것도 아닌거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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