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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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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힘이 세다
  • 딴지 USA
  • 승인 2022.03.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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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기억되는 전래동화가 있다. 어린 남매를 키우며 떡장사로 연명하는 가난한 엄마 얘기다. 과부 엄마는 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떡을 팔고 집으로 가던 중 호랑이를 만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는 속임수에 떡도 다 빼앗기고 급기야는 목숨까지 잃고 만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어린 남매들까지 잡아먹으러 집으로 가서 해프닝을 벌인다. 비극적인 이 이야기는 해학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오누이가 온갖 위협을 넘어 해와 달이 됐다는 설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역사적 사실성만 남겨놓으면 아주 끔찍하고 잔혹한 스토리가 된다.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설화와 문학의 언어가 비유와 상징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것의 원관념을 상정하면 끔찍한 민중의 역사가 알몸을 드러낸다.

이 동화에는 두 개의 스토리가 중첩돼 있다. 한 이야기는 호랑이가 엄마의 떡과 목숨을 빼앗는 이야기이며 남매가 호랑이의 위협을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는 이야기다. 호랑이가 엄마와 대화를 하고 남매를 속이는 장면, 남매가 하늘에 오르는 동아줄을 타는 장면과 해와 달이 되었다는 설정은 설화적 상상력이다.

설화적 메타포 안에 있는 또 한 이야기로써의 속뜻은 호랑이로 상징되는 탐관오리의 수탈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말처럼 탐관오리가 얼마나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했으면 먹고사는 문제를 포도청의 권력에 빗대었던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랑이의 말은 포도청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검찰과 경찰 권력이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과정에 대한 은유다. 엄마의 죽음 과정은 당대 민중의 빼앗겨 헐벗고 굶어 죽어가는 역사다.

아버지는 군역을 나갔다가 전쟁으로 죽거나 공납금을 못 내 맞아죽었을 것이다. 과부가 된 여인은 떡장사로 어린 두 남매를 근근이 먹여 살린다. 하지만 이 시대 중민가의 과부 인권은 사회적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색을 탐하는 마을의 호색한들이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떡을 빼앗아 먹듯이 정절을 빼앗는 일이 없었겠는가. 가난하고 힘없는 여인에겐 자신을 노리는 호랑이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홀로된 여인,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여인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없는 그 때, 떡 하나씩을 던져주듯 생명을 연장하다 결국 처참한 종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굶주림이든지, 남정네들의 성적 노략이든지, 아니면 관아의 폭정이든지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남매도 그러한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게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의 어린 자식들은 길바닥에 나앉거나 각설이패 같은 데 끼어 거렁뱅이로 살다가 배고파 죽거나, 맞아죽거나, 풍토병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중담론은 이러한 비극적인 삶의 알몸에 설화적인 상상력을 입혀 비극성을 감춘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어린 남매의 죽음을 천상의 세계로 승화시켜 해와 달이라는 영원한 시간 속에 빛나게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플롯을 구성하는 중요 기재는 거짓말이다. 호랑이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하지만 떡을 받아먹고 또다시 반복적으로 떡을 요구한다. 안 잡아먹는다는 약속을 번복하며 계속 위협을 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잡아먹어버리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호랑이의 탐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매의 집에 가서도 의심하는 그들에게 손에 밀가루를 묻혀 자기가 엄마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 이야기의 인물과 사건을 연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호랑이는 거짓말을 한다. 아니 호랑이로 상징되는 추잡한 권력은 거짓말로 국민을 속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이라는 초현실적 구원 수단이 없이는 이들은 호랑이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초현실적 구원의 수단이 기적적으로 늘상 따라오진 않는다. 그러므로 초현실적인 구원보다 현실에서의 거짓말이 더 힘이 세다.

이번 대통령선거를 치르며 주변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이재명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대충 이런 것들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 빨갱이, 부정부패, 전과 4범, 형수 욕설 같은 것들이다.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그토록 확증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정보를 통해 진실을 이해하기보다 이미지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지가 그들에겐 더 크게 작용한다. 이미지는 거짓말을 한다. 나쁜 놈들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을 할 때 정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미지만큼 거짓말을 잘 포장하는 것은 없다.

이번 대선은 거짓말 선거였고 이미지 선거였다. 우리의 삶을 통찰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뻔뻔하게 자기 치부를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워 거짓말을 한 자가 승리했다. 그것은 대통령 후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거짓말하는 자들의 뻔뻔함이 집단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그 집단에 신천지와 개신교회와 무당이 한 몸이 되었다.

나는 대선 끝나는 날 아침에 교회 입구에 붙여놓은 <신천지 출입금지> 스티커를 떼버렸다. 내가 붙인 게 아니라 이전 교회에서부터 붙여놓은 것이긴 하지만 지금 그 스티커와 구호가 거짓말이 돼 버렸다. 신천지를 이단시하던 교회들이 신천지를 비호하고 그 대가로 그들과 정치적 커넥션을 갖고 있는 사람을 지지하여 당선시켰으니 신천지에 대한 이단성과 부정의 구호는 거짓말이 돼 버렸다. 그동안 교회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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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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