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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적 인간들에게 계속 신의 칼을 맡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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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적 인간들에게 계속 신의 칼을 맡길 것인가
  • 딴지 USA
  • 승인 2022.02.2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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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퍼져나간 넷플릭스 한드 3종 중 하나인 <지옥>에는 사람이 자율적으로 만든 법체계가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 살인자는 참회하고 있는가 묻는다. 공포가 아니라면 무엇이 인간을 참회하게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며 오직 공포만이 사람들을 정의롭게 할 것이라고 한다.

신천지를 떠올리게 하는 새진리회, 가세연을 연상시키는 화살촉. 인간을 응징하는 이유는 인간이 더 정의로워지기를 바라는 신의 뜻이라는데 신생아마저 응징의 대상으로 삼아 자가당착에 빠진다. 신의 응징이 아무 원칙이 없다는 건 곧 종말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법이 원칙없이 사람에 따라 수사여부를 결정하고 고무줄 판결을 내린다면 그것이 곧 지옥인 것이다.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저울, 한 손에 법전을 들고 눈은 안대로 가린 이유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궁지에 처한 안토니오를 구하기 위한 포셔의 재기 넘치는 판결은 그간 피도 눈물도 없던 샤일록을 응징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오랜 세월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샤일록과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했다.

사람을 벌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래서 16세기 부패한 성당이 판매한 것도 면죄부가 아니라 면벌부였다. 신께 돈을 바쳐 잘 보이면 벌을 면탈할 수 있다고 속삭였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벌할 수 있는 신의 칼자루를 쥐어준 게 검경이고 법원이다. 법원을 최후의 양심으로, 어떤 경우에도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다. 기소권과 공소권, 육법전서라는 신의 칼을 쥐어준 건 인간이 스스로 더 정의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자 약속이다.

이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수십 년 동안 피의자를 봐주고 오히려 그들과 동업자가 된 검사, ‘돈’이라는 인간의 화폐에 법과 양심을 팔아넘기고 범죄자들을 뒤에서 봐주는 대법관, 이 정도면 이미 지옥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중세, 신만이 가진 면벌부를 화폐에 팔아넘긴 부패한 성직자들이 오늘날에는 면벌부를 쥐고 흔드는 검찰과 법원이다.

인간이 좀더 정의로울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이유가 다 사라지면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종교개혁은 검찰과 법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검사든 판사든 그들의 전횡이 하도 버라이어티하여 마치 가십처럼 다루고 있지만 실은 국가의 기강 아니, 삶의 원칙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것이고 그들을 벌할 사람도 그들과 한 식구들이니 국민들의 절망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원칙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것을 원칙이라 윽박지르는 사람이다.

예술은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보는 도구가 된다. 드라마 지옥에서처럼 신의 응징이 아무런 원칙이 없다는 것은 종말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이런 부패한 중세적 인간들에게 계속하여 신의 칼을 맡길 것인가, 이번 선거가 가진 시대사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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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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