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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청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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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청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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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2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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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청년들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0대 청년과 취업준비생인 여성청년을 자식으로 둔 50대 아줌마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내 자식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쓰는 편지가 되겠지요. 사실 여러분들이 ‘청년세대’를 과대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있습니다.

유엔에서는 65세까지도 청년이라고 규정(이또한 근거없는 얘기라고 아래 페친께서 알려주시네요. 이런걸 함께 배운다고 하지요)하니 ‘청년’만큼 애매모호한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한국사회에서는 대체로 20대 전반에 걸친 연령을 청년이라고 부르는 듯하니 저도 그 기준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언론에서 청년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데에는 다분히 서울 중심의 혹은 서울 주요 대학 재학생이거나 취준생 20대라는 생각은 지우기가 어려운데 이또한 저의 편견이라 지적한다면 그 연원이 무엇일까 하는 논란의 여지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꼰대 아줌마의 잡소리라고 여겨도 어쩔 수 없지만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사이인 만큼 한번쯤은 귀를 기울여주길 바라요. 말이든 글이든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는 늘 있게 마련이니 혹 걸리는 단어나 문장이 있다하여 숲이 아니라 나무만으로 매도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있습니다. 이런 걸 기성세대는 자기검열이라고 말합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대된 지금은 자기검열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특히 진보를 자신의 정치적 성향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제 권력자가 아니라 언론이나 청년 여러분들을 염두에 둔 자기검열을 하게 된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솔직히 매우 씁쓸하기도 합니다.

저는 최근 고민정 의원의 분교발언에 화들짝 분노하는 여러분과 기성세대에게 연일 놀라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밉상이라고 하는 고민정의원은 ‘학력, 학벌, 부모직업, 고향, 나이’를 가리는 공공기관 공정채용법 제정안, 일명 ‘블라인드 채용법’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경희대 수원캠퍼스 혹은 분교라는 발언을 하여 여러분에게 항의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을 저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고민정 의원이 사과와 해명의 답을 썼는데 또 문제가 되었더군요.

저는 고민정의원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더욱이 어느 캠퍼스 출신인지 알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분에 대해 특별한 호불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논란이 된 발언을 보며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는 고민정의원이 오히려 좋아보이더군요. 지방캠퍼스를 나왔어도 굳이 물어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게 한국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니까요. 아, ‘지방캠퍼스’라고 하면 안되는 건가요? 블라인드 채용법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엉뚱한 데 불똥이 튀어 주객이 전도되다보니 이렇게 소심해지는군요.

이쯤에서 저도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을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는 소위 지잡대, 혹은 지거국이라는 학교를 나왔습니다. 대학원 다니는 오빠 때문에 너무 버거워 국립대를 가라는 부모님의 뜻에 서울대를 갈 실력은 안되니 울며 겨자먹기로 제가 사는 동네의 국립대로 진학했어요. 예전에 제가 대학을 갈 때는 진학률이 30% 내외였고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등록금에 지방대를 많이 갔지요. 지금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에서 일차 거르고 경기권 대학에서 2차 거르면서 벚꽃피는 전선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는 게 현실이라 지거국의 위상은 과거와 판이하게 다르지만 그렇다고 제가 다닌 학교의 학생들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방대란 무엇입니까. 서울이 아닌 나머지 지역을 지방이라 부르지요. 하지만 카이스트와 포항공대를 지방대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지방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작동하는 복잡한 심리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지방에 위치한 대학, 혹은 非서울권 소재 대학'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청년세대 여러분만의 생각이 아니라 기성세대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는 환경에서 자랐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며 학업을 강요받아왔으니 일면 억울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놓고 이제와서 웬 열? 하고 말이지요.

기성세대 안에서 이런 말이 회자되곤 합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전 이 말을 비교적 최근에 그것도 자신을 진보라고 여기는 분에게서 듣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도 진보꼰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지요. 그러니 부모의 뜻에 따라 재수 삼수 혹은 어릴 때부터 서연고 주문을 외며 성장한 여러분을 비난하는 일부 기성세대가 몹시도 못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긴 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사람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학력고사 전국 몇등을 울궈먹는 세상이니 말해 뭣하겠습니까.

참고로 제 딸은 수능에서 3년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는데요,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말에 ‘시험보는 것도 내 실력’이라며 재수를 거부하고 지방국립대를 갔습니다. 그리고 최근 블라인드 채용으로 국제기구 인턴십에 합격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합격하고 나서 보니 대부분 sky출신이었다고 하더군요. 비록 인턴에 불과하지만 제 딸은 블라인드 채용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서류전형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셔야 했을 거예요. 고민정 의원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취업준비생들이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전형을 얼마나 반대하는지를요. 지역소재 대학출신들이 깜냥도 안되는데 그들 때문에 자신들의 파이가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아마 이것은 대입에 농어촌 전형, 사배자 전형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정원외 전형이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남부러울 게 없는 이재용의 아들이 사배자 전형으로 학교에 들어가는 게 화가 나던데 여러분은 저와 많이 다른가 봅니다.

경희대는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답게 2007년부터 수원캠퍼스를 국제캠퍼스라 이름을 바꾸고 10년 전에 이미 이원화에 성공했다지요? 제가 알기로 한국외대, 성균관대, 한양대등이 이원화에 성공한 것으로 압니다. 연세대도 1학년은 전원 송도 캠퍼스 소속 아니던가요? 그런데 그게 아세요? 이원화에 성공한 대학들은 전부 수도권에 제2캠퍼스를 둔 경우입니다. 그래서 지방대라는 말이 불편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 경기까지는 지방이라 부르지 말아달라고 말이지요.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는 조려대라고 부르고 반드시 조치원 캠퍼스를 표기하지 않으면 고려대생을 사칭한다고 비난한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사는 원주에는 연세대 제2캠퍼스가 있습니다만 많은 이들이 원세대라고 부르지요. 말 그대로 수도권 밖, 경기 이남에 있는 분교 혹은 제2캠퍼스는 다 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 같지요? 블라인드 채용법이 아니라 분교발언으로 논란의 주인공이 된 고민정 의원도 지난 총선에서 페이스북에 수원캠퍼스라 밝히지 않고 ‘경희대학교’라고만 써서 학력 허위기재 혐의로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고발되어 피고발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제 2캠퍼스를 밝히지 않아서 문제, 이번엔 과거 분교였으니 분교라고 했다 하여 문제, 저는 이 상황이 참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이 지점에서 홍길동이 살아돌아와 한바탕 통곡을 할 것만 같군요.

우리 좀 솔직해져 볼까요? 고민정 의원이 이원화된 국제캠퍼스를 분교라느니 지방대라느니 말하는 것에 왜 화가 날까요. 고민정 의원은 국제캠퍼스가 아니라 수원캠퍼스를 다녔으니 틀린 말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히려 경희대는 본캠, 분캠의 차별을 두지 않고 전공 중심으로 이원화한 것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요? 차별을 극복해낸 학교라고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과거 분교였던 시절에 다닌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 마이크를 잡는 게 기분 나빴던 것은 아닙니까? 차별금지법으로 이원화된 제2캠퍼스까지는 좋은데 그 외 지방에 있는 분교를 포함한 지방대생들이 여러분을 제치고 블라인드 채용법으로 합격하는 기회를 갖는 게 싫었던 것은 아닌가요?

마치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브랜드화하며 오래된 대림아파트를 이편한 세상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코오롱 아파트를 하늘채로, 대우아파트가 푸르지오로 바꿔쓰는 것에 화들짝 거부반응을 보이는 걸 생각하면 고민정 의원은 이원화된 국제캠퍼스 출신인 양 혹은 회기캠퍼스인 양 비껴가지 않았는데 왜 도리어 그녀가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저는 납득이 잘 안됩니다. 일관성이 없잖아요.

저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가난했던 주제에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날 다스리겠다고? 하는 심리요. 저도 제가 지방대 출신이니 당연히 학벌콤플렉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왜 수도권 대학원에 가서 학벌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는 분들도 있어요. 이것이 한국사회의 민낯이니 어쩌겠습니까. 대서특필한 언론도 문제지만 소위 진보연 하는 인사들도 싸가지 없다느니 설화로 화를 자초한다느니 입다물고 살라느니 모교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조롱하는 판국에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뒤늦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는 그들에게 숨겨진 교묘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제가 돌을 던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가치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온 것은 다름아닌 우리 세대니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진보들은 자기 자식이 공부도 잘해야 하고 공정하기도 해야 하고 게다가 생태적 감수성까지 갖추기를 요구한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저도 무척 반성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또한 ‘능력주의’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내면화되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네. 이렇게 기성세대는 못났습니다. 물론 우리도 개천에서 용 나야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데올로기를 강요당했으니 억울하고 할 말도 많지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건 기성세대나 청년 세대나 우리는 더 나은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과정 속에 있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잘해보려 했으나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어요. 생각을 말한다고 잡아가고 맘에 안 든다고 노래를 금지시키고 함께 다같이 잘 살자고 말한다고 식칼로 위협하던 시대를 지나온 기성세대는 절차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세우는 것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생각했고 어느 정도 성취해냈다는 자부심이 매우 큽니다.

여러분의 조부모 세대는 어떠한가요. 배곯지 않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내 새끼 배불리 먹이는 게, 한 자라도 더 가르쳐서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게 꿈이었고 나라가 좀더 부강해져서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 세대 어깨에 놓였던 숙제였어요. 그래서 그분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맨날 데모질하는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가난을 알아? 전쟁을 겪어봤어? 하고 노여워하셨더랬어요. 마치 586세대가 청년세대에게 너희들이 유신을 알아? 뭐만 하면 잡아가던 시대를 경험해봤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지요.

그래요.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다 자기할말은 있는 거지요. 해방 1세대가 역할을 잘 해주었기에 해방 2세대인 586세대가 민주화를 말할 수 있었고 3세대인 여러분은 공정과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비록 이것저것 엉망인 것들도 많지만 이젠 지구 어느 구석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중국인이냐 먼저 묻는 나라에서 어깨에 힘들어가는 나라, 촛불집회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위정자를 몰아낸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니 이만하면 1세대 2세대의 성적표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지 않나요?

제 딸이 그러더군요. 어느 세대나 시대적 과제가 있고 586세대는 그 과제를 충실히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해냈으니 자부심을 가지라고요. 지금 세상은 더 만신창이가 된 것 같지만 그래도 배곯고 고문과 감옥 갈 걱정은 일절 안하고 살 수 있게 되었노라고, 자신들은 청년세대에게 지워진 시대적 과제가 버겁고 막막하지만 방법을 찾아가고 있으니 믿고 지켜봐주는 여유를 보여달라고요. 청년들이 한가지 잘못한다고 훈계하듯이 달려들지 말아달라고, 자신은 그 친구들과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데 생각이 없다느니 한심하다느니 말하면 듣는 청년 기분 나쁘다고 말이지요. 훈계가 아니라 먼저 경청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꼰대짓은 아닌가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자기검열을 하게 됩니다.

혹 ‘지록위마’라는 말을 들어보았나요? 진시황이 죽자 환관이었던 조고가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황제로 세우고 실권을 장악하였는데요, 조고가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좋은 말 한 마리를 바칩니다’ 라고 했대요. 당연히 호해는 어찌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가 하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조고는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을 기억했다 죽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보고 듣는 주체가 ‘나’가 아니라 성공신화 혹은 가짜 언론, 혹은 부자에 이입된 왜곡된 자아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도 보아하니 언론이 교묘하게 비틀어 약한 고리를 건들어 논란에 부채질을 했더군요. 그들이야말로 현대판 조고들입니다.

한림성심대를 ‘한림대’라 쓰고 서울대 경영전문가과정을 ‘서울대 경영대 석사’라고 쓰는 것에 제 상식으로는 한림성심대, 한림대, 서울대 경영전문가과정, 서울대 경영대가 공식 항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군요. 이런 기괴한 상황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한답니까. 단지 청년 여러분의 선택적 분노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 왜곡의 대상이 된 네 곳의 그 누구도 나서서 따지지 않는데 당사자인 여러분이 기분나쁘다고 항의하는 것을 무어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밥이 중요했던 조부모 세대, 자유가 중요했던 여러분의 부모 세대에 이어 여러분은 그 토대 위에 공존과 공감, 연대의 가치를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세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86세대가 해방세대를 밟고 진보해왔듯 여러분은 586세대의 성취와 한계를 밟고 더 넓고 더 높이 비상하는 세대, 기성세대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갖길 바라요. 함께 웃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걸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여러분은 미래가치에 역행하는 사술을 벗어던지고 주류 밖에 서 있는 여러분의 동료들, 가난한 부모를 만나 대학이 아닌 취업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던 여러분의 동무들과 손을 잡고 앞세대가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듬고 창조해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것만이 지금의 불공정 사회를 만들어놓은 기성세대에 여보란듯이 복수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두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관심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자식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성세대나 여러분이나 각자에게 주어진 짐을 기꺼이 지고 가자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내 발밑만 바라보면 풍경을 다 놓칩니다. 옆사람하고만 이야기하면 같은 풍경만 보게 되지요. 저는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전후좌우, 때로는 낯설고 다른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세상의 다양한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목소리들을 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블라인드 채용법을 말하면 논점을 비껴가지 말고 본질을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인데 말이 길어졌습니다.

긴글 읽어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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