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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리 사회가 총독부가 뿌리를 박아 놓은 식민지 개발 투기의 망령에 휘둘리는 게 아닌가
 회원_524484
 2022-05-10 12:09:05  |   조회: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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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일본 제국의 만주철도 주식회사가 일본 본토와 대륙을 연결하기 위해 한반도의 동해안에 만주 종단 철도의 연계항을 찾고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의 자본이 너도 나도 유력한 항만 후보지인 함경북도 청진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청진항은 어항으로나 개발될 정도로 협소했다. 예상치 못하게도, 일본 총독부는 길회선 연계항을 청진 밑의 조그만 어촌인 나진으로 결정해 발표해 버린다. 이렇게 되니 온 조선에 난리가 났다. 이름도 없던 어촌, 인구 2만의 나진 땅값이 한 달 새에 1천배가 뛰어 버린 것이다. 조선 사람들 전부가 "아, 나진에 땅 한 뙤기라도 사 두었을 것을." 이렇게 푸념하고 다녔다. 항만 건설을 위한 측량이 시작되기도 전에 신문 기사 한 줄만으로 땅값부터 폭등한 것이다. 이때 나진의 투기 열풍을 '황금비'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렇게 되자, 좋다가 만 '청진'의 조선 주민들이 궐기대회를 일으키고 총독부에 항거를 시작한 것이다. 나진이 벼란간에 급격히 크지면 청진의 위상은 축소되고 거주민들도 썰물처럼 그쪽으로 빠져나가 유령도시가 될 우려마저 있었다. 청진에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조선인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나진 항만 건설 반대!, 청진항 유치를 외치며 이 운동에 거국적으로 동참했다. 거대한 부동산 시세차익을 원하는, 이러한 목적 앞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조차 없었다. 그야 말로 진정한 '내선일체'가 구현된 것이었다.

이런 땅값 투기가 너무 과열되니 만주철도사는, 발표 이전의 가격으로 나진의 토지를 수용하겠다고 결정해 버렸다. 발표 이전부터 있던 지주들과 큰손들은 이미 투기로 엄청난 이익을 보고 떠난 뒤였다. 뒤늦게 이 투기 대열에 뛰어든 '잔챙이'투기꾼들만이 큰 손해를 보고 수용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쟁이 거듭되던 나진항 땅값은, 원안보다 조금 더 인상된 가격으로 최종 타결되었다.

온 조선의 돈이 다 몰릴 것같던 나진항의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무렵, 나진 일대 땅값은 서울 땅값보다 비쌌다. 천배, 만배씩 올랐던 이 어촌의 땅값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로 값이 떨어지고 나서야 하락세를 멈췄다.

축항 공사가 진행중이던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동해의 다롄"이 될 꺼라며 온 조선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욕망을 품게 했던, 종단항 나진의 장밋빛 청사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딱 9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에 의해 조선은 급격히 자본주의가 이식되었지만 그게 정상적인 자본주의일 수는 없었다. 그런 한 단면을 중일 전쟁 직전의 함경북도 나진의 땅바람 투기 바람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일본이 이식한 이런 비정상적 자본주의의 뿌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같다. 지난 2년 반동안의 부동산 폭등의 양상은 한 마디로 저금리 상황에서의 '갭투자 열풍'이자 패닉 바이잉의 끝판왕이었다. 묻지마코인 열풍과 마통 주식투자 현상 또한 그랬다. 아직도 우리 한국인들은 합리적으로 시장을 보고 있지 못하며 상식과 이성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바람'에 좌우되는 것같이 보인다.

토착왜구라는 말을 싫어하는 '진보' 학자들이 있다. 무조건적 반일 감정이 과연 진보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총독부가 뿌리를 박아 놓은 식민지 개발 투기의 망령에 휘둘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이 땅이 과연 언제 정상적인 자본주의, 정상적인 시장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조차도 예컨대 주가 조작같은 범죄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엄정하게 처분할 일인데도 가볍게 넘어가려 하고 있다. 분식회계도 그렇다. 한국이 과연 진짜 자본주의를 해 본 적은 있었던가?라는 의문마저 들게 만든다. 부동산 바람은 여전히 거세고, 공정한 룰이 아닌 공권력에 휘둘리는 경제. 이걸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는, 식민지 경제의 망령을 떨어버릴 과제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https://www.facebook.com/lee.joohyuck.9/posts/4580685238700287

2022-05-10 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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