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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은 검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비리에 침묵하는 목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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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은 검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비리에 침묵하는 목사 사회
  • 딴지 USA
  • 승인 2020.09.18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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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목사

1.

머리 좋은 수재들이 검사가 되어 천박한 정치권의 고소만 있으면 즉시 움직이며 그 하수인 노릇하는 것을 바라보며 어제는 측은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검사들이 검찰총장 가족의 비리나 자신들의 비리에 관하여 무한 관대하다는 사실은 이제 주지의 사실만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로 여겨진다.

목사 세계는 다를까? 하루에도 몇 번씩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는 다를까? 세상을 향하여 회개를 요구하던 자신의 목소리를 그들은 청종할까? 아마 그렇다면 나는 한국교회나 목사들을 향하여 구태여 비판의 소리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목사들은 검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

검사들의 부패와 탐욕보다 어쩌면 성직자들이 부리는 탐욕이 더 비이성적이고, 더욱 불법적이다.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여도 “은혜스럽게”를 외치며 지나간다. 교회를 서로 팔아먹는 일을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평생 교회에 헌신하자고 가르쳐 평신도들은 가진 것 없는 것 다 바치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목사만 은퇴하면서 교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신보장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목사 사회에서는 이런 비리에 대하여 “침묵한다.”

검사들을 나무라고 비판하던 개혁 성향의 목사들조차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성경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자고 가르친 이들이다. 전근대적인 계급 위계구조를 가진 교회에서 목사들이 침묵하니 장로들도 입을 다물고, 그 아래는 자기 생각을 피력할 엄두도 못 낸다. 그러다가는 교회생활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상처 입은 가나안 교인들은 이래서 생겨난다.

3.

나는 교회의 공적 직임을 수행하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 행위의 신학적, 윤리학적, 사회적 및 법적 정당성을 찾으며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의료행위를 하는 이나 법조인들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고, 전체 사회의 안녕을 책임지는 이들로서 그저 단순한 자의적 판단만으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이는 공직을 맡으면 안 된다.

작년부터 그리고 최근에 법조계와 의료계가 엄청난 비난과 욕을 먹었다. 일반이 이해하던 법조인이 지켜야 할 행위의 코드, 의료인이 지켜야 할 행위의 코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직자가 공적 임무를 수행할 때 지켜야 할 행위의 코드는 없는 것인가? 법조인이 되거나, 의료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업의 성실도가 매우 높아야 하고, 국가고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그렇지 않다. 교단마다 중구난방이다.

그러니, 무엇이 성직자가 지켜야 할 규범인지 목회 윤리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신도들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교회를 위한 결정과정에서 무엇을 존중해야 하는 지, 정치적 사안과 관련하여 성직자가 가져야 할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서울연회 감독의 목회서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4.

목사들은 모두 선량하다는 주장에 나는 이견이 없다. 그들은 선량한 의도로 목사가 되고, 선량한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설교한다. 약자 편을 들고 병든 자를 보살피며,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이들이 목사다. 삶의 현세적 지평만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지평을 바라보는 이들이 목사인 까닭이다. 그런데 이들같이 선량한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 될 때가 있다.

교회는 오래 동안 흑인을 차별하는 일을 선량하게 주장했다. 목사 장로를 비롯해 선량한 사람들은 지난 역사에서 20세기에 이르도록 여성을 차별하는 일을 당연시해 왔다.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남을 차별하면서 스스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직자들의 선량함이 간혹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겨 자신들 안에 있는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

5.

서울연회 감독의 목회서신에 대한 비판의 글을 낸 후 나는 교단 불문 몇몇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모니터 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구태에 푹 절어있는” 설교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는 “우리는 절대 오류가 없단 말씀이야”라는 태도다. 심지어 판에 찍은 듯한 논리가 전개되고 있다. 여성문제, 차별금지법, 동성애 혐오, 그리고 무수한 책임전가가 당연한 듯 “선량한 목사의 설교”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가물에 콩 나듯, 구태에서 벗어나 보다 “공정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었다. 한동안 특정 목사의 청렴함과 평등의식에 고무되어 나의 제자들에게 “저 목사를 본 받아라”라고 했다가 나의 권고를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선량한 모습만 보고 그 이면에서 부리는 탐욕과 차별의식을 보지 못했던 이유에서다.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형성되는 가치판단은 은혜를 받는다고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6.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하여 일순간 바꿔놓으시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평생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 지저분하게 살게 된다. 신학사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목사가 되어 헌신한 경우가 많이 있다. 라인홀드 니버의 아버지도 목사였다. 불룸하르트도 그의 아버지가 목사였다.

불룸하르트 아버지는 소위 신유의 은사가 있었던 유명한 부흥사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고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아버지의 목회를 바라보면서 아들 불룸하르트는 병고침을 받고 회개한 사람들이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었지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탐욕의 파티를 멈추지 않으면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 영향은 오늘의 복지사회를 이룬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어 권에서 대단했다.

7.

나의 글에 대한 응대는 아직 보지 못했으나 두 사람이 나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하나는 원감독과 같은 지방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글인데 그 내용은 조야했고, 또 하나는 평신도 같은 데 소위 “사탄”이라는 용어로 나를 빗대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는 원감독이 페이스북을 모니터링하면서 답글을 단 내용을 내 페친들이 올린 것이다.

우선, 공적 목회서신을 낸 자기 자신을 사적으로 변명하는 것은 감독답지 않다. 그의 변명은 두 가지다. 첫째, 구상권, 벌금이 나오거나 자신이 범법하여 구속되면 법률 비용을 대줄 장로들이 있다.“라는 것. 둘째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만이 아니라 “지지 전화도 많이 받는다. 젊은 이들의 의식을 살피지 못한 것을 알았다. 기도해 달라”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행간에 감춘 그의 속내는 두 가지가 더 있다. 비판에 대해서는 “쏘리“지만, 결코 취소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실망스럽게도 전광훈이와 같은 패턴이다. 그의 두 가지 주장의 속내는 불성실한 우파들의 좌파 비판과 현실읽기를 따라한 결과다.

8.

광우병 파동이 불온한 자들의 헛 주장이었다고 보는 그의 시각이 그렇다. 지금도 그 때처럼 난리를 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감리교 선량한 감독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나는 당시 광우병 파동의 전후를 예민하게 살펴본 윤리학자로서 그의 판단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광우병 사태는 촛불 혁명의 전야제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파들에게 거짓으로 매도되고 혐오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원 감독은 그런 눈으로 목회를 해온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문제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질서를 어긴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던 일이다. 소를 대량으로 사육하는 나라에서 1980년대 초반부터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양과 소의 사체를 소의 사료 원료로 사용했는데 이 사료 원료에 광우병과 같은 증상을 일으키는 ‘스크래피(scrapie)’에 걸린 양이 포함됐던 것이 광우병의 원인이었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류를 먹이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행위로 인한 천형(天刑)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광우병 파동은 무의미한 헛 것이 아니라 첫 사례 보고 이후, 광우병 파동 당시까지 영국에서 184,551건, 아일랜드 1,623건, 프랑스 984건, 독일 415건이 발생했다. 소의 전염병인 광우병에 걸리면 사람은 100 % 죽는다. 그런데 광우병 성분을 가진 소고기가 대부분 소령(소의 나이) 30개월 이상이 된 경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우병 파동 당시 일본을 비롯한 유럽 사회는 소령 18개월 미만의 소를 수입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24개월 이상이 된 소를 비롯하여 내장 등 부수 육류까지 수입하려 했던 것이다. 분명 국민의 건강을 해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왜 좌파의 모략이고 공격인가?

현재 전 세계에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가 1997년 8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 결과 그 이후에 태어난 소에서는 광우병 발병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광우병이 원천 봉쇄된 것이다. 좌파가 없는 일을 만들어 정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광우병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이었고, 이런 노력은 급기야 “동물성 사료의 위험”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광우병을 원천적 차단했기 때문에 지금 광우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래 첨부한 그래프를 보면 1992년 전 세계적으로 피크에 올라 약 3만 7천 여건에 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 감독은 왜 그의 범법을 조장하는 “목회서신”에 대한 비판을 이명박 시절의 광우병 파동과 견주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광우병 시위로 마음이 상한 이명박과 같이 자신의 선량한 의도를 모르는 일부 불온한 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번이 말하지만, 인식과 판단의 오류가 있는 상투적 편견에 사로잡히고, 그 편견을 이용하여 자기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지식인의 성실한 태도가 아니다.

9. 내가 왜 그의 목회서신을 비판했을까? 정치와 종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윤리적 원칙이 있다. 교회와 정치가 공유하고 있는 영역은 “민주주의”다. 루터나 칼빈은 정치는 공공의 선을 지킬 책무를 가진다고 가르쳤다. 정치의 영역은 사랑이나 영혼구원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이고 정의의 영역이다. 간혹 종교가 근거도 명료하지 않은 비이성을 앞세우고, 정의보다 자의적 신앙을 앞세워 난동을 부리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종교가 이용당한 경우였다. 루터시대의 재세례파 난동이나 30년 100년 전쟁이 그 사례고, 가까이는 나치 독일 제 3공화국,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이 그랬다.

펜데믹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시제에 정부의 방역 지침을 “개신교에 대한 탄압”이라 오독하고, 순교적으로 대면 예배를 드리며 저항하자고? 만의 하나 잡혀가거나 벌금이 나오거나 구상권 청구가 들어오면 내 친구 장로들이 억대 돈을 댈 테니 염려하지 말자고? 도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떤 신학, 어떤 현실 인식에서 나오는 것인가? 요즘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국 감리교의 에큐메니칼한 정신을 어디다 감춰두고 감리교 감독이라는 분이 목사직도 박탈된 자, 대통령을 공개 모욕하다가 이젠 순교자 코스프레하는 전광훈이와 어쩌면 그리도 닮은꼴이신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10.

감리교회에는 전광훈이 추종자들과 같은 부류의 지지 전화를 받는 이런 감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 중에는 사안을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진정한 회개와 반성을 통해 거듭난 신앙의 지평을 찾자는 진솔한 소리도 있다. 그런 소리는 페친들께서 찾아 진지하게 경청해 주시기 바란다.

긴 글을 읽는 번거로움을 드려 송구하다. 나는 평생 감리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을 소명으로 해온 사람으로서 감리교회를 사랑한다. 나는 감리교회의 지도력이 오판하는 것을 방임할 수 없어서 이런 글을 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서울연회 원성웅 감독이 진실 앞에 서서, 그의 경솔한 목회서신을 즉시 철회하고 감리교회와 우리 사회 구성원 앞에서 사죄를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위의 도표는 광우병 발병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도표는 광우병이 인류사회를 위협한 흔적이고, 이를 점차 지혜롭게 극복한 사례를 보여주는 도표다. 극복해 온 것이다. 아무일도 없었는데 민주시민들이 공연히 난리친 사건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아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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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K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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