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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피의 댓가로 사신 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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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피의 댓가로 사신 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아닙니다
  • 딴지 USA
  • 승인 2020.09.0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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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우종학 교수님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퍼온 글로, 글 하단에 출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교회당의 우상화

교회당이 우상화되는 듯 해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모이는 교회당이 어떻게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건지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1.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시대의 상식이었고 그 사실이 성경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령, 바벨탑 사건 때 하나님은 '내려가서' 바벨탑을 살펴보기도 하고 모세와 만날 때는 시내산처럼 높은 곳에 임하기도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늘입니까? 대기권 16킬로미터 위입니까? 아니면 우주공간입니까? 우주공간이면 태양계 어디쯤입니까? 그럴리가요. 하나님은 어느 한 공간을 점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2.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 족장시대에 성막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성막 안에 임합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막에 계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기적으로 성막에 가야 합니다. 성막에 가서 제사드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꼭 어딘가 정해진 곳으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구약시대에는 그랬습니다. 성막이라는 장소는 하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자세한 내용이 레위기와 신명기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3. 왕국이 시작되고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면서 성전이 성막을 대신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성전에서 만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주지가 아니라 단지 만남의 장소일 뿐이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의 위상은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그럼 우리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하나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4. 솔로몬 왕이 죽고 왕국이 두 개로 분열되자,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함은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남 유대왕국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보고 염려합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제사드리러 가다보면 남유다의 왕을 따르게 되고 자신을 배신하고 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이라는 도시에 각각 두고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 벧엘과 단에서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대신 금송아지를 섬기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였습니다.

어디서 예배하는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대한 이슈임을 여로보암 왕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였지만 동시에 권력의 상징이자 정치경제적인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목사들의 주장을 보면 여로보암 왕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데 꼭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하니, 마치 여로보암왕처럼 이분들도 교인들의 마음을 뺏길까 걱정하는듯 합니다.

교회당에 안 나오다가 앞으로 주욱 교회당에 안 나오면 어쩌나? 그러면 교인을 잃은 목사는 갈 곳이 없겠지요. 물론 교회당에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며 신앙을 잃을까 걱정하는 진정한 목회자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목회자들에게 여로보암 왕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들은 교회당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여기서만 예배드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요?

5. 왕국이 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이 패망하고 남유다도 패망합니다.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 뿐만아니라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도 여전히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다시 건설되기를 반복하지만,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성전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갑니다.

지금도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한번씩 가보는 것은 좋은 경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율법을 따라 성지인 예루살렘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면 최소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6. 신약시대에 헤롯대왕이 건설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성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적 착취의 핵심이 됩니다. 당대의 권력자인 제사장 집단은 성전을 통해 각종 이권을 취했습니다. 장거리 여행으로 예루살렘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전, 제사로 드릴 동물 판매, 성전세 등으로 경제적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도시 경제 규모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성전을 방문한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분노했고 환전 상인과 각종 장사꾼들의 가판을 엎어버리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핵심 권력자인 제사장 집단에게 미움을 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성전과 관련된 이권이었습니다. 예수의 무리들 때문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성전을 비롯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기득권은 상실될 위기를 맞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 중에서 제사장들과 같은 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얼마나 많은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공동체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기 예수께서 나타나도 이단으로 낙인찍고 출교시킬 것입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안 가르쳐 줍니다.

7.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 장면이 뜻깊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패망한 이후에 외국인들과 혼혈이 되면서 그들은 사마리아인으로 불렸고 남유대인들에게 개취급을 당했습니다.

여인은 묻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벧엘)에서 예배드렸는데 당신들은 (남유대인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대학생때 유년부 교사를 했습니다. 초등 2학년을 가르치는데 교재에 이 장면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묻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무엇이냐고?

여러분 스스로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대로, 벧엘에서도 말고 예루살람에서도 말고 교회당에서도 말고 집에서도 말고,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과연 무슨 뜻인지.

8.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신약시대 교회가 시작됩니다. 여전히 성전에 가고 할례를 받는 등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으로 상징되듯이, 이제 성전의 의미는 상실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작은예수, 크리스천으로 불렸고 다락방이나 마당이나 어디서든 사람들이 모이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라고 바울이 가르칠 때 그 교회는 교회당이 아니라 교인들이었습니다.

9. 80년 부흥기를 거치며 한국개신교는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교인들에게 소위 성전건축헌금을 받고 빚을 내어 부동산을 소유했고 이웃사랑은 제쳐두고 예배당 건물에 온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마치 솔로몬의 성전처럼, 마치 교회당이 하나님의 거주지라도 되듯이 가난한 교인들의 헌금까지 박박 긁어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교회당이 성전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오도한 셈입니다.

10. 교회를 예배당 건물과 혼동하는 건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함은 세상과 다름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흰옷입고 촛불켜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 그런 외양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다르게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교회당 건물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당을 구성하는 벽돌이나 자재의 원자 분자들이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신령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들어선 자리나 그 공간이 신령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주술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곳은 단지 세상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즉 거룩한 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일 뿐입니다.

교회당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개신교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11.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는 연결고리였듯이 목사들은 마치 제사장이라도 된 듯이 주술적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당 건물에만 임재하시고 목사들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거치며 저항했던 개신교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만인제사장을 가르쳤습니다. 목회자중심주의는 정확하게 개신교의 정의에 어긋납니다.

12. 대면예배를 강조하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대면예배가 중요하다고 하고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 대면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목사님입니까?

하나님이라면,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교회당이 무슨 구약시대 성전이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무소부재하는 하나님을 당신들은 교회당 안에 가두는 것입니까?

그 대면의 대상이 목사입니까? 그럼 목회자를 대면해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목사들이 구약시대 성전의 제사장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은 개신교를 믿는 것이 맞습니까?

13. 장소는 언제나 정치경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당이라는 한 장소에 주기적으로 모이는 일은 권력을 발생시킵니다. 단지 교인들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종교적 권력 뿐만 아니라 헌금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권력을 만들어내며 또한 교인의 숫자에 따라 주변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인 사회적인 권력을 만들어 냅니다.

권력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당 중심구조가 권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모든 다른 권력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기 쉽습니다.

긴 세월동안 교회당을 중심으로 알게 혹은 모르게 권력을 누리고 기득권을 공고히 했던 목사들은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교회당 중심적인 패턴이 무너지는 게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대면예배를 고집하고 목숨을 걸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피의 댓가로 사신 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당은 교인들의 피땀으로 샀겠지만 그렇다고 건물이 신령해지지 않습니다. 거꾸로 교회당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습니다. 여로보암왕이 예루살렘으로 제사하러 가는 백성들을 막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라고 했듯이 교회당을 우상화하는 모습이 보여서 걱정입니다.

사실 가장 무서운 경우는 나는 참목자인데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데 그래서 대면예배를 강조하는 건데라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경우입니다. 정말 대면예배를 강조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14. 내가 속한 교회가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교회라면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혹시 교회당을 우상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왜 대면교회를 주장하시는 건지, 그 대면의 주체가 하나님인지 목사님인지, 예배당중심주의를 못 벗어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개신교가 아니라 유대교나 유교의 전통에 서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면 과감히 교회를 나오십시오. 교회당을 교회로 잘못 가르치는 모임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15.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공동체를 지키려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비대면 예배에 동참하는 존경할만한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가정예배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기 어려운 성도들을 생각하며 가슴조리고 염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분들께는 항상 미안한 마음입니다. 교회를 비판하면 정작 그 비판의 대상들 보다는 이런 분들이 미안해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교회공동체에 심각한 위협이 닥치더라도 이웃의 안전을 위해 희생해야 할 때입니다. 희생의 각오가 있는 교회라면 진정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사랑은 바로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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