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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목숨 건다며 방역지침 무시,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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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목숨 건다며 방역지침 무시,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는가?
  • 딴지 USA
  • 승인 2020.08.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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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늘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앞 이빨 두개가 심하게 비뚤어진 까닭이 늘 궁금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앞 이빨 두 개가 완전히 뒤틀어진 사연을 이야기해주셔 그 의문이 비로소 풀렸다.

내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이었다(118기?). 본래 언론사 생활을 하시다 박정희가 5.16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직후 군에 입대했다고 하셨다. 남들보다 약간 늦은 나이였다고 한다. 당시는 해병대가 '개병대' 소리를 듣는, 구타와 폭언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반 기독교 정서와 문화가 아주 심한 집안에서 가족 모두가 극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9살 때부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새벽예배, 수요-금요 예배, 주일 예배를 빼먹은 적이 없는 아주 독실한 신자였다. 해방 이전 시절이었으니, 교회에 가려면 최소 40리 이상을 걸어 가야했으므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 일어나야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독실한 신앙생활은 해병대에 입대해서도 여전했다. 신병 때부터 모든 에배에 빠짐 없이 참석했고, 새벽 기도는 내무반에서 새벽 2-3시에 일어나 침상에 무릎을 꿇고 혼자 속으로 기도룰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참병들에게 엄청난 미움과 갈굼을 당했다고 했다. 심지어 죽여버리겠다는 폭언도 다반사로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고참들이 아버지에게 '일요일에 교회 가면 가만 안 두겠다'고 최후 통첩을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그 일로 그날 저녁 고참들이 아버지에게 기합을 주었다. 기합의 내용은, 완전군장을 한 채 커다란 M1 소총을 입에 물고 밤새 연병장을 도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다니기도 힘든 M1 소총을 이빨로 물고 연병장을 밤새 도느라, 아버지의 앞 치아 두 개가 완전히 비뚤어진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 설교 시간에 해병대 시절에 기합 받았던 이야기를 전하면서, 아버지가 그러셨다.

"그날 밤은 진짜 힘들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교회를 5개 개척하고 건축하면서 평생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 그날 설교에서는 해병대 시절에 예배 드리러 갔다는 이유로 기합 받았던 것을 거론하면서, 처음으로 '힘들었다'는 말을 썼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셨던 분이었다. 항상 최선을 다해 정갈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셨다. 때로는 그 열심과 정성의 기준이 높아, 가족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나는 아버지로부터 '예배에 목숨을 건다' 혹은 '예배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그저 삶으로, 행동으로 예배의 소중함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

그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까닭에 나도 '성수 주일' 개념이 철저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봉사를 빠지지 않았고,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일 아침 6시면 교회에 가서 혼자 예배당 전체를 물걸레질로 두 번에 걸쳐 깨끗하게 청소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한 일이었다.

..

내가 19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96년에 군종장교로 임관하여 처음 발령받은 곳은 맹호부대 기갑여단이었다. 원래는 포천에 있는 기갑여단 한 곳만 담담하면 되었는데, 가평에 있는 26여단의 목사님이 갑자기 공석이 되어 한 동안 두 부대 교회를 담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포천을 출발하여 가평으로 넘어가 26여단에서 9시 예배를 인도하고, 다시 포천으로 넘어와 11시에 기갑여단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가평과 포천을 넘나들기 위해서는 명지산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문제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철이었다. 평상시에도 차를 몰아 산을 넘다 보면 귀가 멍한 현상이 나타나는 제법 높은 곳을, 겨울에 눈이 잔뜩 왔을 때 넘나드는 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주일 새벽에 눈을 떠서 창밖을 봤을 때 하얀 눈이 온 사방을 덮은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던 그런 시절이었다.

전방에서 5년 간 군목 생활을 하는 동안, 겨울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악천후를 뚫고 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일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 일을 갖고 내 목숨을 걸고 예배를 인도하러 왔다고 교인들에게 말한 적이 없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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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내가 과거 18년간 담임목회를 하는 동안, 정결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교우들에게 무던히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배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라는, 신학적 주장에 불과한 언설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강제한 적은 없었다.

다만 목사가 반듯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여주면, 심성이 선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스스로 그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례들을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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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공공방역을 위해 제발 2주간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예배는 생명과 같다,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는 구호를 앞세워 정부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들이 지금처럼 민주적 통제를 실시하는 정부 하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정부의 조치에 반하여 그렇게 예배에 생명을 걸 수 있을지, 사실 확신이 안 간다. 왜냐하면 지금 반정부 전선을 펼치며 예배 옹호론 내지 사수론을 설파하는 이들의 평소 면면이, 신뢰가 별로 안 가는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교계 실정을 조금 깊이 아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고결한 예배조차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투쟁 구호로 변질된 현 상황이, 뜨악할 뿐이다.

더욱이 '예배에 목숨을 건다'는 구호가 도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개신교 안에서 대중적인 구호로 자리잡았는지를 알기나 하는가?

내 기억이 맞다면, 성범죄로 유명한 전**이 1990년 초반 혜성(?) 같이 등장해서 입버릇처럼 외쳤던 구호가 바로 '예배에 목숨을 걸다'였다. 그리고 그의 큰 성공(?)에 깊은 감명과 자극을 받은 한국의 수많은 목사들이 그 구호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불과 이십 수 년 전 일이다.

하지만 예배에 목숨을 걸다, 예배는 생명과 같다고 외쳤던 그 목사는 결국 반복적인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고, 이로 인해 피해자와 한국교회에 끼친 해악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그 목사는, 주일에 예배당에 사람들을 모아 드리는 예배에는 목숨을 걸었을지 모르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삶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에, 자신도 망하고 한국교회도 망친 것이다.

책임 있는 삶이 부재한 일요일의 예배가 이토록 허망하고 참혹한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묻고 싶다.

지금 정부의 방역지침에 맞서 주일에 목숨을 걸고 예배당에 모여 생명과 같은 예배를 드리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목사, 장로, 권사들에게,

과연 당신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공의 영역에서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삶이 있는가?라고.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3272696279490754&id=100002512424962

By 김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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