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실체 없는 한국교회, "비난해봤자 공허해질 뿐"
상태바
실체 없는 한국교회, "비난해봤자 공허해질 뿐"
  • 딴지 USA
  • 승인 2020.08.20 0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교가 큰 위기에 처한게 아니라 원래 실체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 당혹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외에 우리에게 무슨 교리가 더 필요한가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함께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말하기는 쉬운데, 여기서의 함정은 그 '교회'라는 주체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존재로서의 교회는 바로 아픔을 겪고 희망을 듣고 싶은 그 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당장 '내 코가 석자'라 교회에서 지원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또 누구를 도우며 누구의 편에 서라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사역의 주체인 교회는 공허한 언어현상일 뿐이거나, 그나마 가시적으로 보이는 이, 곧 목사 자체가 된다. 교회에 대한 수 없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공허한 이유는 그 비판자가 바로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이고, 깨달음을 실천해야 할 사람이라는 데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 역시 '세상 안에' 있기에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대상화할 수 없다. 교회도 세상의 일부인데 어떻게 객관적 주체가 되어 세상을 비판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가. 그 해석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물 안의 물고기는 물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물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 세계가 그러하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세계는 인간(교회)에게 열리고, 계시되고, 암묵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선이해), 객체화가 가능한 이해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교회는 이해도 할 수 없는 대상을 변혁하려 노력해 왔다. 그래도 교리화된 진리라는게 개념만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복음이라는건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선포자와 세상과의 끊임없는 유기적 관계, 해석적 순환이 전제된 성찰적 과정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비둘기이자 뱀이며, 성도이자 세속인이고, 사역자이자 사역의 대상이고, 비판자이자 비판받는 자이다. 데카르트에서 아인슈타인까지 고전 물리학이 관찰자와 대상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로 한다지만, 불확정성이론 이후 물리학도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유기적 관계임을 인정한다. 내가 보기엔 그냥 교회가 세계고, 세계가 곧 교회다. 일요일에 특정한 공간에 모이면 교회라 부르지만, 흩어지면 그들이 교회의 사역 대상이 된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본회퍼라기 보다는 선동가 괴벨스에 가까운 전광훈은, '70~'80년대 한국교회라는 무속적 토양에서 탄생했지만, 알 수 없는 동물적 감각으로 오늘날의 일부 청중들에게 자신을 맥락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장막성전 미장공이었던 이만희가 가게를 새로 차려서 성공했던 것처럼. 설명은 이미 듣고 있는 사람의 이해의 지평 속에서 해석되는 법이다. 전광훈은 청중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평 속에서 자기 텍스트의 좌표를 비교적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가난, 억압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청중은 전광훈이라는 현상을 자기 삶의 지평에 잘못 맥락화함으로써 미래 지평의 궤도를 완전히 오인해 버렸다. 심지어 코로나가 정부의 음모로 자기 교회에 퍼졌고, 자기들은 하나님이 다 고쳐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전광훈은 경상도 어느 지역에라도 나오면 국회의원은 당근이고, 대선에 나와도 20~30%의 득표는 얻을 정도의 암묵적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자신이 한국교회의 일부인데, 실체가 없는 한국교회를 백날 비판해봤자 공허해질 뿐이다. 전광훈 같은 이들은 비난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뿐더러, 그걸 다 의인이 받는 핍박 정도로 여길 것이다. 희한한 것은 미통당이나 어떤 수구세력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광훈은 종교적 광신의 이름으로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사회의 한계를 넘어가는 힘을 보여준 것은 언제나 종교였다. 사람들의 참된 자발성과 희생을 끌어내는 힘도 종교만이 보여줄 수 있다. 이 엄청난 잠재성을 이런 곳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자기를 성찰하며 세계와 소통하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현존재로서의 공동체가, 역사적 맥락과 현시적 공간 속에서 비정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며, 서로를 돕고, 세상을 섬기고, 자신들의 삶을 역사적 지평 위에 다시 세우는 의미 순환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종교의 힘은 사람들이 이 <시지프의 신화> 같은 답이 없는 순환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는 말도 안되는 초월적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일텐데,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상상적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전쟁으로 선동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이 밤에 너무나 큰 절망이 밀려온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https://www.facebook.com/joshua.k.choi.5/posts/10158630750994176

By Joshua Kyuchang Choi
By Joshua Kyuchang Choi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 /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