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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로버트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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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로버트 뱅크스
  • 딴지 USA
  • 승인 2020.07.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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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로버트 뱅크스, 신현기 역, IVP(2017).

 

1. 잃어버린 무엇, 본질적인 그 무엇.

"지난 2000년 동안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본서의 그리 길지 않은 서문 중 유독 필자의 마음을 무지근하게 만들었던 한 문장이다. 이는 저자가 본서를 통해 제기하고자하는 문제의식이 압축적으로 녹아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초대교회 예배 모임의 모습을 통해 우리네 교회가 잃어버린 무엇, 그러나 초대교회가 간직하고 있었던 본질적인 그 무엇을 끄집어내어 상기시킨다. 이를 토대로 우리네 교회가 이뤄나가야 할 회복의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도록 돕는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야흐로 '탈교회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다음 세대 위기론'은 굳이 다음 세대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현 세대의 심각한 교회이탈현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에 기성교회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왕적인 카리스마 목회 양식으로 교인들을 휘어잡기도 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차별화된 프로그램들과 체계적 신앙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교회의 상품성을 높이는데 힘쓰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보편적인 대응은 아마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목소리 높여 개혁을 부르짖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탈교회의 흐름은 도무지 역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제왕적 목회는 기복주의와 몰상식을 낳았고, 각종 프로그램과 관료적 시스템은 교회의 세속화와 인간의 도구화를 부추겼다. 결기에 찬 구호는 피상적인 외침에 머무를 뿐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렇게 교회가 요란한 헛발질을 거듭하는 듯이 보이는 현실 속에서, '교회가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저자의 진단을 우리는 그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은 무엇인가? 초대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2. 책 소개

저자는 어느 날 유대인 부부의 저녁식사에 참가하게 된 푸블리우스라는 로마 군인의 회상과 증언을 통해 초대 교회 예배 모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본서는 창작된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다년간에 걸친 저자의 연구를 토대로 역사적인 신빙성도 갖추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초대교회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만한 폐쇄적인 카타콤이 아니라 다문화적인 거대도시 '로마'인데, 이러한 도시적 배경은 필자로 하여금 오늘날의 다원화된 도시사회와 초대교회 모임의 모습을 연결시키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인물인 아굴라와 브리스가, 바울의 서신을 등장시키는 것도 독자 입장에서는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였다.

본서를 읽는 동안 필자는 마치 그 모임에 초대받은 또 한 사람의 손님이 된 것처럼 소박하고도 생동감 있는 초대교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필자가 독자로서 초대받아 참여한 그 모임에서 발견한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 초대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그 무엇'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이례적인 환대와 개방성이다. 둘째, 성도의 교제, 즉 '수평적 차원의 사귐'이다. 셋째, 소박한 일상성 속에 자리한 비일상성(급진성)이다.

2-1. 환대와 개방성

기독교회는 사상적으로 그 어느 집단보다 강력한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요,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파격적인 고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날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극명한 배타성을 보이는 집단 중 하나이다. 교회 안에는 '보편이 담아내지 못하는 불편'이 만연하다.

교회는 모든 경계와 막힌 담을 허무는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가지고 되려 '예수 안'과 '예수 밖'을 날카롭게 나눈다. 교회가 자신들의 기준으로 규정지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교회의 문턱을 높이고 폐쇄적인 자세로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단지 교회 안팎을 나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편 가르기와 사상검증, 우월의식과 배제가 난무한다.

용서 받은 죄인들의 모임임을 자처하는 교회이지만, 죄인들에게 가장 박하게 구는 집단도 다름 아닌 교회이다. 스스로가 만든 이분법적 폐쇄성에 더해 각종 이단들까지 극성을 부리면서 교회는 급격히 개방성을 잃고 사람들을 환대하기보다 움츠러들어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서가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이방인 푸블리우스의 눈에 보기에도 매우 이례적인 환대와 개방성을 가진 공동체로 그려진다. 모임은 어느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방문자의 신분과 상관없이 환대의 포옹과 입맞춤은 동등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를 기꺼이 공동체원으로 맞으며 그를 돌보겠다고 서약하는 타자에 대한 헌신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이례적이었으나 결코 의례적이지 않았다. 타자를 위한 교회이기보다 교회의 존립을 위해 낯선 이로 하여금 타자로 머물기를 종용하는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2-2. 수평적 차원의 사귐

네 개의 벽, 높다란 강대상, 그리고 정면을 향해 늘어져 있는 장의자들.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기본적인 구조이다.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가 앞을 보게 된다. 내 옆에 앉은 이가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만큼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니, 전심으로 찬양하고 귀기울여 말씀듣고 눈물로 기도하면 그뿐이다. 옆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고 개인의 신앙고백에 몰입할 수 있도록 고맙게 불도 꺼준다.

오늘날의 예배는 공동체적 차원을 거의 상실했다.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짧은 '축복의 시간'에 대게는 사람은 뒤에 있는데 일쑤 앞에 있는 스크린을 향해 쑥쓰런 손을 내밀어 축복(?)하곤 한다. 교회 공동체성 현시의 총화인 '성찬례'마저도 그저 조금 특별한 개인적 묵상의 기회를 제공받는 시간쯤으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예배 내에 결여된 수평적 사귐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배 후 소그룹 모임 등을 시행해보지만, 그 특성상 단회적이고 피상적인 교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교제의 피상성이 교회의 폐쇄성과 만나면, 모임은 진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가면 쓴 이들의 만담회가 되고 만다. 위선과 가식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곧 교회를 떠난다. 이는 개인적-수직적 차원의 사귐에 몰두해온 한국교회 영성에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푸블리우스의 특별한 모임에서 예배는 수평적 사귐과 분리되지 않았다. 사귐이 예배의 여러 순서 중 한 요소에 그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귐 그 자체가 예배 모임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개인적인 예배행위가 아니라 서로 간의 사귐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를 직접 경험하였고, 땅 위에서 하늘을 미리 맛보았다.

사귐에는 부자, 종, 노인, 어린이, 여성, 갑자기 찾아온 손님까지 그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귐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위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자연스러운 식사의 과정 속에서 소박하고도 진정성 있는 교제가 발생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의 사정을 소상히 알았다. 타인의 고민을 자신의 일처럼 여겼고, 어려운 이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했다. 본서를 통해 엿본 초대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사귐의 공동체'였다. 먹고 마실 음식과 삶을 나눌 좋은 친구들이 있는 곳. 그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3. 일상성 속에 자리한 비일상성(급진성)

7일 중 가장 거룩한 주일을 지키고,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성회를 기획하며, 교육부서 수련회의 대박을 꿈꾸고, 대망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 비일상적인 이벤트에 귀의해 일상의 권태감과 허무를 돌파해내려는 시도는 한국교회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일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급진적인 능력은 사라지고,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혹은 세속적인 기복의 수단으로써의 복음만 남았다.

교회는 자신의 급진적인 구호와는 다르게 수구적인 행태로 엇박자를 내며 날로 후패해져 간다. 그들이 '세상'이라 낮잡아 이르는 비종교적 영역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못할 때가 많다. 열정페이는 교회 내에서 신앙페이로 존속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인권,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마저 교회 내의 몰상식과 맹신에 의해 무시된다.

거창한 종교적 수사와 각종 행사로 비일상적인 시공간을 확보하려고 하면 할수록 일상과의 괴리는 심해진다. 교인들은 종교적 영역 밖에서는 힘조차 쓸 수 없는 방안퉁수가 되거나,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단순 치환해버리는 소통불가의 외계인이 되었다. 종교적 비일상성에 함몰되어 일상을 인간답게 향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야말로 이 시대의 '게토'가 아닐까?

갈릴리에서 설파되고 제자들에 의해 퍼져 나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본래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 자신의 가르침 속에 등장하는 언어들에는 거룩한 종교적 수사의 향내음이 아니라 흙냄새, 땀 냄새, 시장 냄새, 갈릴리의 바다 짠내음이 가득 배어있다. 복음은 지난한 삶의 자리 한 가운데서 선포된 매우 실제적인 구원과 해방,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모든 일상을 공유했다. 특별한 때와 장소가 아니라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사람들과 함께 둘러 앉아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는 일상적인 자리가 예수의 급진적 복음이 재생산되고, 실험되고, 실현되는 자리였다.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초대교회에게도 복음은 삶의 원리, 생활 양식 그 자체였다. 그들은 단순히 내세와 초월에 천착하기보다는 주어진 일상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그들의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어갔다. 소박하면서도 역동적인 초대교회의 '비일상적 일상성'은 초기 기독교 운동을 이벤트도, 캠페인도 아닌 하나의 역동적 삶의 양식 즉, 무브먼트로 만들었다.

본서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모임에는 특이하게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도, 종교적 수사와 구호도, 종교심을 부추기기 위한 작위적인 행위도 없었다. 종교 모임이라기에는 심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행위 속에 당대의 위계질서를 타파하는 비관습적인 환대와 개방성이 있었다. 그 안에는 급진적인 평등과 자기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사랑의 교제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공동체에 의해 초대된 '성령'과, 함께 떼어 나누는 '예수의 몸'은 그 자리를 단순한 일상을 넘어 비일상의 지성소가 되게 했다. 복음의 원리에 입각한 자유로운 논의들과 실제적인 구제와 돌봄을 통해 모임에 참석한 자들은 '지금 여기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임한 하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다.

3. 수많은 푸블리우스들을 꿈꾸며...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사람들 자체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초청을 받아들여...어쩐지 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모임을 경험한 푸블리우스의 말이다. 우리가 대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어왔던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달라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이 낯선 이방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급진성을 갖춘 이색적이고 인상적인 모임, 사람냄새 나는 매력적인 모임, 초청에 응하고 싶은 즐거운 모임. 오늘날 이런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얼마나 될까?

본서는 각자도생의 한국교회 영성에 던지는 경종이자 대안교회를 꿈꾸는 이들의 가슴에 펌프질을 해주는 책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있으나 그에 따른 실제적인 대안이나 모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우리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이정표를 제시해준다.

필자는 우리네 교회가 그 잃어버린 본질을 회복하기 원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푸블리우스들을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로 초청하기 원한다. 교회를 통해 신앙에 매력을 느끼는 푸블리우스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필자와 같은 꿈을 꾸는 당신에게 적극 권한다. 이 모임은 당신에게도 열려있다. 오늘 밤, 푸블리우스의 손을 잡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으로 가보라.

 

출처:https://www.facebook.com/realsound.david/posts/3449634208403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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