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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삶을 살았던 박원순, 그의 죽음은 '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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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삶을 살았던 박원순, 그의 죽음은 '역사적 사건'
  • 딴지 USA
  • 승인 2020.07.12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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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에 대하여]

나의 존경하는 친구 박원순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강렬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그냥 내 얘기를 써보겠습니다.

1.

어제 오늘 키보드를 두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멍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이렇진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 걷다가 집안에선 서성거릴 뿐,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원순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다가 아연실색했습니다. 어떤 것도 사실로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박원순의 전 비서가 성추행과 관련한 고소장을 제출했고 경찰은 고소인 조사를 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몰상식한 사람들이 고소사건이 죽음의 인과관계인양 몰아가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와 관련된 세계의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킵니다. 그와 연계고리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침묵해야 합니다. 오로지 애도(哀悼)의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출생신고서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정의당 애들이 가해자니, 피해자니, 2차 피해니, 3차 가해니, 조문을 하니 마니, 어쩌구저쩌구 떠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항상 뒤바뀔 수 있습니다.(왜 그런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예정임)

일베수준의 애들이 정의당이라는 이상한 정당을 통해 국회로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얘네들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왼쪽 깜박이 키고 오르쪽으로 회전하는 자동차보다 더 위험한 얘들입니다. 노회찬 이후 정의당은 사라졌습니다.

박원순이 나에게 끼친 강렬한 영향 때문에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정의당 애들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2.

기업에서 실무를 하던 2004년 가을쯤이었을 겁니다. 느닷없이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이 나를 찾아 왔다고 비서가 메모지를 들여보냈습니다. 마침 몇몇 임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중단하고 접견실로 모시도록 했습니다.

박원순은, 당시 내 옆방에서 일하던 황 부사장(지금은 중견기업의 부회장 겸 대표)을 찾아와서 시민운동을 조금 도우라는 얘기를 한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경기고 동기동창이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를 소개해 주었다는 겁니다. 내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시민운동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고 나를 꼭 보고 가라고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쑥 들렀다는 겁니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시간까지 오줌 누러갈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 직무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 명함을 주고받은 후, 내가 지금은 곤란하니 시간과 장소를 잡자고 했습니다. 프라자호텔에서 조찬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당분간은 내가 회사일을 조금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시민운동을 할 수는 없고, 내 처지에서 도울 수 있는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났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그러니까 2009년 6월에 쓴 블로그의 글("나의 삶을 부끄럽게 만든 남자_박원순 변호사")에서 세번째 문단 "오래 전 실무에 있을 때 <아름다운가게>에 끌려 나갔습니다."라는 말은 바로 이때를 말하는 겁니다.

3.

박원순이 <희망제작소>를 할 때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강렬한 삶의 모습에서 감동했습니다.

나는 기업을 떠나 2009년 가을학기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박원순은 어느날 갑자기 서울시장이 되더니 시민사회가 기대했던 대로 서울을 인간중심적인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이디어뱅크였습니다. 시민참여옴부즈만 제도를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계약업무에 시민옴부즈만이 입회와 감시업무를 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전화하더니, 느닷없이 봉사를 좀 했으면 좋겠다고해서 몇년간 시민옴부즈만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열정에 벽돌 한 장이라도 놓아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4.

박원순은 언제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원하는 성과와 성취를 향하여 주변을 휘몰아치는 방식으로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대선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전화하더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원순은 이미 조직을 만들어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원로그룹을 시장공관에 초대해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평소 박원순의 행정과 정치에 대해 솔직하게 평가했습니다. 쓴소리를 좀 했다는 말입니다. 박원순이라는 브랜드는 행정의 달인처럼 각인되는 점이 있지만, 정치력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지지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정치력은 시민적 의제를 선점(agenda setting)하는 게 핵심인데, 그걸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차기 대선에는 기본소득(basic income)이 핵심이슈가 될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참모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기본소득'보다는 '전국민고용보험' 이슈로 정한 것 같았습니다.

그후 몇 차례 통화를 했는데도, 별반 나아지는 것은 없어보였습니다. 시민들이 원하는 올바른 의제를 선점하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자문하고 싶었지만, 젊은 보좌관들과 교수들, 그리고 자문역들이 수두룩 한데 뭐 하러 나까지 나서겠나 싶어서 그만두었습니다.

5.

나는 언제나 내 한 몸 추스리기에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져 주지 않는 내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일에 바빴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 은퇴 후에는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내 성향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박원순은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사회발전을 위해 바쳤습니다. 가족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박원순의 장례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박원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원순은 자신의 흠결과 단점을 충분히 성찰했기에 우리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미련없이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입니다. 나는 소심했고, 그는 위대했습니다. 노무현도, 노회찬도 그랬습니다.

위대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이 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6.

박원순이 없었다면, 그가 서울시장이 아니었다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광란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박원순의 죽음은 애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입니다.

 

나의 삶을 부끄럽게 만든 남자_박원순 변호사

https://mindprogram.tistory.com/241?fbclid=IwAR04-fCdsVN0SaTwq7p7j_IgZzUFLHPYOIxUL8vqVZe4XYMlJNxGeR76qfs

 

 

출처: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331265821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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