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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독백(부끄러운 고백)" 중 조선시대 노비 종모법에 대한 반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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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독백(부끄러운 고백)" 중 조선시대 노비 종모법에 대한 반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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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5.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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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독백(부끄러운 고백)" 중 조선시대 노비 종모법에 대한 반박문 --

대통령 비서실 종교다문화 비서관의 SNS글에 대해 내가 한번 반박해 보겠음.

이런 무식한 글이 나온 이유는 한국의 일베와 극성 우익들이 이영훈 등 우익 학자가 유튜브에 나와서 강연한 걸 얼핏 듣고선, "조선 왕조는 망해야 했으며, 결국 일제가 조선을 치우고 이 땅에 근대화를 가져왔다"라는 식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합리화하는 논거로 곳곳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임. 김성회라는 무지한 아저씨도 어디서 그런 거 한번 보고 저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임.

김성회의 원문 글 ; ((조선 세종때 노비 종모법으로 노비 수가 27%까지 늘고 성종때 42%가지 늘었는 고로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비였다.

노비는 자유가 없었고 여성 노비는 양반 주인이 수청을 요구하면 따라야 했다. 결국 여성인구의 절반이 양반들의 성적 쾌락의 대상이었다.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자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 자 일단,

노비 종모법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봅시다.

노비는 조선시대때 시작된 제도가 아니라 고조선 시대부터 있었음.

그러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일천즉천. 즉 모친 혹은 부친 어느 한 쪽만이라도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 이런 법을 통과시킴. (종모종부법).

이 법의 취지는, 양민과 노비간 통혼을 하지 말라, 그걸 금지한다는 거였음. 나라의 신분제가 무너질까봐 불안해서 왕이 만든 법임.

근데 권문세가들 (호족들)이 이를 악용, 가난한 양민과 노비간 통혼을 일부러 조장함. 이렇게 되니 노비의 수가 엄청 많아져 (부모중 한 명만 노비면 자식도 노비니까) 호족들이 자기 재산인 노비 수 증식의 수단으로 신나게 활용하게 돼 버림.

이렇게 되니 양인의 수가 줄어 국가에 세수가 감소. 지방 호족은 재산 (노비)이 늘어 부유해짐. 이때문에 중앙 정부가 호족에 힘에서 밀릴 여지가 자꾸 생김. (사실 통일신라도 호족들에 의해 망했고 고려 역시 함경도의 군벌 이성계에 의해 폐국.....)

태종때 황희가 노비종부법을 제안. 즉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라는 법이었고 이게 통과됨.

황희와 태종 생각엔 아무래도 양인 아버지 - 노비 엄마, 이렇게 통혼하는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많았으므로 "종부법"을 쓰면 노비 숫자가 줄고 양인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 것임.

그러나 노비 수가 별로 안 줄었음. 왜냐. 점차 돈 있는 천인들의 신분 세탁 용도로 이 법이 남용되었기 때문. 당시 노비가 워낙 많다 보니 노비 사이에 계층화가 돼 버려서, 재산을 축적한 부유한 노비들이 자녀를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가난한 양인을 불러다 돈 몇 푼 주고 가짜로 아버지라 위증 공모해서 자식을 면천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세종이 생각하기에 삼강오륜의 나라 조선에서 이런 따위의, 천륜을 어지럽히는 일은 두고볼 수 없다 하여 노비 종모법을 시행한 것임. 결코 친일 유튜버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조선 사대부들의 욕심으로 노비를 마구 늘리기 위해 종모법을 시행한 게 아니고, 그 반대였음. 줄이겠다는 거였음. (엄마가 누군진 속일 수 없으니까)

근데도 노비수는 획기적으로 줄지 않음.

그 이유는 (이게 중요한데) 노비 제도의 성격의 근간이 뭔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음. 조선은 농업 국가였으므로 모든 생산력이 농업에서 나오는 나라였음. 즉 국가 입장에선 자기 땅을 경작하는, 양민들이 많아야 세수가 늘어 풍족해질껀데, 귀족, 호족들 입장에선 양민보다 노비가 많아야 좋았던 거임.

따라서 이런, 중앙정부와 귀족/호족간의 상호 견제에 의해 노비-양민의 숫자가 그때그때 맞춰지면서 간 사회가 조선이라고 보아야 함.

만약, 노비 종부법 종모법같은 제도를 입안 실행한 결과로 노비 면천이 왕창 되면,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기 땅이 없는 양인은 불가촉 천민보다 못한 신세일 뿐임. 졸지에 엄청난 수의 빈민들, 즉 경제력이 아에 없는 사회 불안 계층이 양산되는 것임. 그럼 이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유랑걸식을 하였고 혹은 도적떼가 되기도 했음. 이런 도적떼가 엄청나게 많아지면 아예 지방 반란으로 이어지는 거임. 따라서 조정에서도, 면천이 너무 많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음.

이것은 농업으로만 유지되는 조선 경제력에 의한 한계점이었음. 조선 후기, 상공업과 광업 등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농민보다는 임금 노동자가 필요해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는 노비 체제가 사실상 붕괴 조짐이 진작 있었음. 필요가 없으니까. (미국에서 면화 농업의 남부는 노예를 필요로 했고 공업의 북부는 노예를 반대했던 것과 똑같)

조선이 야만적인 노예제와 같은, 노비제를 저토록 오래 유지했던 이유가 뭐겠느냐며 일본 식민지가 돼서 노비들이 해방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음. 조선은 농업 중심의 경제라 생산력이 늘상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국가가 자기 실력으론 천민들을 모두 부양할 수 없어, 그 일부를 양반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던 것임. 그게 노비 제도의 본질이었음.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는 것은 그 데이타로만 얘기할 것이 못 됨. 중세 조선의 행정력은 8도의 인구 센서스를 정확히 할 수준이 못 되었음. 또한 양민의 수를 글자 그대로 잡으면 중앙 정부에서 그만큼 많은 세금과 병력 차출을 요구해 오므로, 지방 수령들은 늘상 양민 수를 줄여서 보고하였음. 이걸 중앙 정부에서도 이해하고 용인했음. 그러니 기록에는 노비가 많게 나올 수밖에 없던 것임. 당연히 김성회 무식 아저씨 말처럼, 절반이 노비일 수는 없는 것임.

조선시대 양반은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노비들을 늘상 성적으로 학대하며 쾌락을 추구했다는 언급도 문제가 있음.

중세-전근대 사회에서 귀족이 평민/천민을 성적으로 농락한 경우는 동서를 막론하고 모두 존재했고 일본에도 있었음.

단지 노비가 숫자상 너무 많았으니 조선은 특히 성적 학대가 만연했다고 그렇게 단순히 읽어 버리면 곤란함. 그 데이타는 지방의 공납과 부역, 세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앙에서조차 어느정도 용인해 주는 부풀린 데이타였던 것임을 알 필요가 있음.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합시다"라는 말도 문제가 있음.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는 "그때 우리 왜 그정도밖에 안 됐을까"라며 답답해하고 한숨쉬자고 하는 게 아님.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지지만, 역사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그때의 일을 평가하는 게 중요함. 오히려 조선시대 노비종모법을 읽으면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의 정력과 성욕이 아니라 종부법 종모법 이런 법안들을 고민 끝에 통과시켜 시행한다 하여도 개개인들이 이 법안의 취지를 얼마나 쉽게 왜곡시켜 편법적으로 활용하는가를 읽으면서, 법을 평면적으로 선의/악의의 법으로 나눌 것이 아니고 그 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행해질 것인가를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입안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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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기

By 이주혁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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