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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1인칭 소설, '요셉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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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1인칭 소설, '요셉의 회상'
  • 딴지 USA
  • 승인 2021.05.1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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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2002년에 <요셉의 회상>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저의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글 중 하나가 1998년 1월에 탈고한 '언어, 하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창세기를 요셉이란 인물의 1인칭 시선으로 정리한 글에서 문자와 언어의 문제를 제기한 점을 대견하다고 자위했습니다. 창세기 주석이나 설교에서 문자나 언어 문제를 제기한 글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20년이 더 지난 지금과 당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책들이 많이 번역되거나 집필이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쓸 때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도 번역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당시 이문열이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중 해당 저서, 그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한 두 권의 저서를 참고했을 뿐입니다. 오늘의 시점으로 보자면 한심할 정도로 게으르고 사실 관계에 문제가 적지 않을 걸로 짐작합니다. 2021년의 시점에서 이 글을 비판한다면 저는 유구무언입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이 글을 공유합니다. 고등학생들에게 했던 설교가 바탕이 되어 쓴 글에 당시 설교자나 주석 학자들이 창세기 본문 해설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인문학적 화두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고 몇 년 뒤 <요셉의 회상>을 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도 1인칭 소설로 연작을 내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 패밀리 모두를 1인칭으로 다루면서 창세기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꿈을 접었습니다. 무엇보다 20년 동안 출간된 책들을 읽으며서 사실 관계를 추적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내 짧은 인생을 그런 일에 투자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던 건 동갑내기 글쟁이 고종석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저는 요셉의 1인칭 소설 형식의 글에 상형문자나 언어의 문제로 상상력을 확대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고종석을 만나 인터뷰했고, 한동안 인하대 김진석 교수와 친구로 지냈습니다.고종석, 당신이 없었다면 이 글은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이 원고를 메일로 보냈습니다. 성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서 짧은 답을 보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뻑에서 벋어날 수 있었습니다. 객관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실제 출판된 책에서는 약간의 표현이나 문장에 수정이 있었습니다만 유철닷컴에 올려놓았던 잡지본 원고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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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하나님의 값진 선물'

내 고향 가나안 땅에는 글이 없다. 글자도 없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사정은 그 땅의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이나 히브리인, 즉 우리 아브라함 패밀리나 피차일반이다. 그들이나 우리에겐 자나깨나 오로지 소리로서의 "말"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우리 히브리어에는 '책'이라는 명사나 '쓴다'라는 동사가 없다. 아니 그런 개념조차 없다.

그러나 이집트는 다르다. 여기에는 글이 있고, 그 글을 가르치는 학교와 선생이 있다. 또한 일생 동안 그 글을 연구하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들도 있다. 이름하여 서기관인 그들은 이집트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며, 따라서 정부의 요직에 두루 등용된다. 내가 듣기로 이집트 제국의 황실에 서기관이 처음 생기던 초창기에는 글을 읽고 쓰는 서기관들의 위세가 바로 대왕에 버금갔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다른 나라들이 금이나 종교에 필요한 귀중품들을 정부가 직접 생산·관리하는 것처럼, 이집트는 글씨를 쓰는데 필요한 파피루스란 용지의 생산과 유통을 정부가 관장한다. 지난 1,000년 동안 이집트는 지중해 연안의 제국들에 이 파피루스를 수출하여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다. 파피루스란 식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제조하는 일은 그런 연유로 국가 시책상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그것들의 제조나 관리에 소홀함이 있거나 범법 행위가 적발될 때는 중벌로 다스린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읽고 쓰는 공부에 대한 이집트 왕실의 특별한 관심이다. 거의 예외 없이 이집트 귀족의 사내아이들은 10살부터 학교에 보내진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읽기, 쓰기와 암기 공부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처럼 이집트식 공부는 많이 쓰고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반드시 암기해야 한다. 암기가 교육의 특징이 된 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암기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고대의 비문이나 법률 문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최소 700에서 최대 5,000개의 기호나 상징적인 그림을 암기해야 한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입을 모아 복잡성을 상형문자의 특징 중 하나라 꼬집었겠는가. 바로 이런 특징은 체벌을 불러들였다. 교육에서 체벌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교육은 늘 시끄럽다. 매를 때릴 때 나는 찰싹소리, 아파서 내는 신음소리, 책을 읽거나 암기하는 소리로 학교 주변은 늘 웅웅거린다. 이곳 이집트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남자아이의 귀는 등에 달려 있다. 등을 때리면 말을 잘 듣는다."

얼마나 많은 매를 맞으며 공부를 하면 이런 격언이 생겼겠는가. 매로도 통하지 않는 둔한 아이는 좁은 방에 가두어가면서 글을 가르칠 정도로 이집트 사람들의 교육열은 극성이었다. 글을 읽거나 쓸 줄 안다는 것이 대단한 영예일 뿐 아니라, 그것이 곧 귀족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대변해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바로 내가 그 예외에 해당되는 케이스였고.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글자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생소함을 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예로 끌려오는 신세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집트 곳곳에 세워진 비문과 건축물에서 생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분명 그림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내게 매우 아름답게 비쳤다. 그것은 일종의 유혹이라 말해도 괜찮을 만큼 내 시선을 빼앗아갔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고단한 노예 생활 중 보디발 장군 집의 벽이며 기둥에서 심심치 않게 있는 이집트 상형문자들을 보는 일은 거의 유일한 취미였고 문화생활(?)이었다.

그 노예 생활이 익숙해갈 무렵 나는 보디발 장군의 총지배인이었던 아샤가 팔림프세스트라는 재생 파피루스에 직접 글씨를 쓰는 신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궁금증이야 한없이 발동했지만, 숫기도 없고 그런 걸 물어 볼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한 나는 말 한마디 꺼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 궁금증을 푼 것은 보디발 장군께서 나를 총애하시는 것이 우리 저택의 화젯거리가 될 무렵이었다. 그날도 아샤 지배인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매우 심각한 태도로 상형문자를 베끼고 있었다.

"총지배인님. 방해를 해서 매우 죄송한데, 지금 무엇을 하시는 거죠?"

"어이구 깜짝이야.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너는 언제 들어왔느냐? 그건 그렇고, 그런데 정말 너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솔직히 저는 총지배인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글씨를 쓰는 것이다. 보디발 장군이 왕궁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이 보고서를 끝내야 하거든."

"그런데 글씨가 무엇이죠?"

"……"

이렇게 해서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내 공부는 시작되었다. 그 일을 도맡아 주신 분은 맘씨 좋은 아샤 총지배인님이었고.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그것은 상형문자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의 초보적인 공부였다. 그분이 쓸 수 있는 상형문자는 자신의 직책과 관련한 초급 산수와 아주 간단한 정도의 보고서가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샤 총지배인님은 상형문자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매우 초보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나마 상형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은 보디발 경호대장군 저택의 총지배인이라는 특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을 통해 저택 안에 있는 각종 장식품들과 기념비에 새겨진 글씨 하나 하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비록 노예이긴 하지만 내가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실제적으로 제공해 주는 몇 안 되는 요인이었다. 가나안에서 겪은 쓰라린 과거를 잊게 해주는 데도 그만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글자 공부에 매달렸다. 나의 이런 열심은 아샤 총지배인에게 더욱 신임과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석회(石灰) 조각에다 내 이름을 써 보던 그날의 감격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 왔다.

그러나 글공부가 많은 진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보디발 장군의 지하 감옥 덕택이었다. 공부에 도움이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바로 대왕의 술 맡은 시종장관님과 떡 굽는 시종장관님이 남겨 놓고 간 책들이 없었다면 상형문자 공부는 별 진전이 없었으리라. 나는 그 책들을 통하여 이집트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 그리고 이집트의 온갖 신들에 대하여 조금씩이나마 공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 꺼림칙한 공부였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외운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치 못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책을 계속 공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하나님께, 그리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꽤나 진지하게 묻기도 했고 기도도 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야곱이나 아브라함 증조할아버지에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분명한 응답은 해주지 않으셨다. 이 기도에 대하여 나는 그분의 어떠한 음성도, 이상(異像)도, 꿈도 듣거나 보질 못했으니까. 그러나 기도 덕분이었는지 그 책을 들고 있을 때의 불안한 감정들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마음에 평정을 회복한 것이다. 그것이 충분한 답이 되었던 것은 아니나, 나는 바로 그 평안에 기대어 그 책의 모든 페이지들을 익숙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제 생각할 때 그분들이 남겨주고 간 책들을 통한 공부는 총리가 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준비였다.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닥치는 대로 읽었던 상형문자들을 통하여 이집트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이 서기관들을 왜 그토록 귀히 여기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토드 신이 문자를 발명한 뒤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글자"는 매우 신성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사자의 서』라는 책은 매우 이교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책이이었다. 이 책은 문자가 마법을 가지고 있어서 죽은 사자가 크눔 신 앞으로 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괴물과 뱀을 물리치고 벌레에게 파먹히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렇다. 나는 똑같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에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과, 그 문자를 만들거나 익힐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 선물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하고 값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이집트 제국이 이처럼 강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천이삼백년 전에 그들이 고안한 상형문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나일강의 혜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이집트의 강성(强盛)함은 상형문자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그것을 통하여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고, 과학․수학․법률․문학 등을 끊임없이 발전시킨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떻게 바로 대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까? 글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분명하고도 널리 교육하고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총리가 되고나서부터 거의 일생 동안 계속해온 일이 있다. 일기 쓰기가 그것이다. 매일 일기를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그만큼 한가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계속 일기를 썼다. 그 일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글씨를 쓰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일기 쓰기에는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파피루스라는 서판에 상형 문자를 그리는 일은 상당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정교한 기호와 그림 등을 이용하여 글씨를 쓴다는 것은 서기관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집트는 필경을 일생의 업으로 하는 관리가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하여 그들은 상형문자를 좀더 빨리 쓰는 글을 고안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필기체의 상형문자를 신관문자(新官文字: hieratic), 또는 사제들이 이 글자를 최초로 고안하여 사용했다고 하여 성직문자(聖職文字)라 불렀다. 어깨너머로 상형문자를 배운 내가, 이런 글이 귀족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어찌 되었든, 내가 이 죽음 앞에서의 글쓰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기를 쓰고 신관문자를 습득한 덕분이었다. 이제는 나도 백열 살이 되다보니 건강도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 만약 신관문자를 못 익혔다면 나는 이 글쓰기를 엄두도 못 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나이에 글을 장시간 파피루스에 쓰는 것에 나는 몹시 피곤을 느낀다. 시므온 형님에게 짧지 않은 글을 쓰고는 사흘을 몸져 앓아누워야 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글쓰기에 더욱 열심을 내고자 한다. 건강에 유의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연약한 나를 들어 온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큰 일을 하게 하신 고마우신 하나님께, 그리고 후손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봉사가 이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으로 쓰는 이 글이 미완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내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게으름이나 잘못된 건강 관리로 인해서 이 거룩한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나는 재삼재사 다짐한다.

시므온 형님에게 편지를 쓰고 난 후 내 생각은 하나뿐인 아우 베냐민과 르우벤 형님에게 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나를 이집트의 노예로 파는 일에 다른 형님들처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에도, 아니 그것을 막아보자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나 다른 형님들과 도매금으로 묶여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무고하게 당한 고통을 늦게나마 이 편지를 통해서 위로하고 싶었다. 르우벤 형님이 이미 세상에 안 계시기 때문에 나는 조카들에게라도 내 마음을 표현할 계획을 가졌던 것이다. 이 편지를 쓰는 과정을 통하여 나는 하나님이 우리 가족 거의 모두가 연루된 이 사건을 다루시면서 베냐민과 르우벤 형님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묵상하고 싶었다. 그것을 통하여 좀 더 하나님의 섭리를 깊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전에 써놓은 글들을 뒤적이다가 그만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내 인생의 한 때에 그토록 즐거움을 주던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어느새 거의 타성에 젖어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쓰기를 하기 위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정신을 집중하고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하여는 꽤나 깊게 생각했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글쓰기가 가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런 글을 발명하고 이 기호들을 응용하여 인간의 거의 모든 사건과 사실, 심지어 추상적인 개념이나 상상의 세계까지 다 기록할 수 있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창의력을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너무 큰 충격이었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렇다. 그건 차라리 기적이라 불러야 한다. 어떻게 거의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평생토록 해 오면서, 더군다나 그 일을 즐겁게 해 왔다고 자부하면서 글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과 위험성, 그리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감사에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사실을 발견하면서 더 이상 서판을 넘길 수가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내 머리 속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들은 부끄러운 감정을 한없이 자극했다.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의롭게 지으신 사실에 대해 평생을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 요셉마저도 그토록 무감각했으니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바로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또 어리석은지를 몸으로 느꼈다. 그 겸허함의 심정으로 나는 요즈음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충격과 겸허는 나의 생각을 아직도 글자가 없는 우리 히브리인, 그 중에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 아브라함 패밀리의 당혹스런 현실로 밀어내어 그 상황 앞에 서게 한다. 왜 문자는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먼저 발명되었을까? 문자를 가진 이집트는 그토록 발전을 했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도 낙후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문명의 발전과 그로 인한 힘의 축적은 신의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같은 논리를 다른 각도에서 적용해 보자. 그렇다면 그 많은 재물을 얻었으면서도 이제까지 정처 없이 떠돌면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패밀리의 현실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긍지로 여겨야 하는가?

다시 한 번 차분히 물어보자. 이집트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형문자를 토드 신이 발명하였고, 그것을 사용함이 이집트의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문자와 그 문자가 이룩한 모든 형태의 발전을 죄악으로 간주, 내다 버려야 하는가? 다시 말해 계속 텐트에 사는 불편한 삶을 고집하면서 문명의 혜택을 거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문자를 이용하여 농업과 수학과 의약과 법전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가? 아브라함 증조할아버지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되는 나라는 문명의 발전과 무관한 세계인가? 아니면 이방적이고 우상적인 요소를 제거한 정화되고 발전된 문화의 나라인가?

이런 하나마나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내 후손들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을 통하여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첫째, 저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 속에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들과 그 일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헤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둘째, 나는 그 염려가 너무 지나쳐 모든 이집트의 문명을 거부하고, 시대와 완벽하게 불화하는 분리주의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복들을 발길로 걷어차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삶의 부정이요 신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일 테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신앙이 주는 결과인 축복을 거부하는 처사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세상을 덮치는 대기근에서 아무런 생명도 구할 수 없을 테니까.

셋째, 이런 나의 우려를 오해하여 이집트의 것이라면 무조건 사족을 못 쓰는 못난 후손들이 안 되기를 또한 기도하려고 한다. 전적인 거부가 옳지 않다면 전적인 수용도 틀린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후손들이 이집트의 최첨단을 걷는 문화와 과학과 의학과 농업, 법률 등에 들어 있는 두 가지를 꿰뚫어 보기를 희망한다. 버리고 경계해야 할 이교적이며 우상적인 요소와 배우고 발전시켜야 할 학문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쓰는 이 조그마한 기록이 그 지혜를 얻는 데 사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길을 앞서 걸은 나는 언젠가 이 글을 볼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노파심으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여기에 적어 둔다.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내 후손들이 내가 안식일이 없고, 번제가 없고, 가족이 없고, 신앙적인 모든 도움에서 차단되었을 뿐 아니라 우상과 범죄가 득실대는 타국에, 그것도 어린 나이로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길 바란다. 그곳에서는 정상적인 의미의 신앙 생활이 불가능했다. 히브리인의 시각에서 볼 때 나는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몸이었다. 따라서 감히 하나님을 부르거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의미도 아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함을 상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어겼다는 찜찜하고 불안한 감정까지 잠재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 거룩한 히브리의 선민들이여! 부디 의식상의 정결이니 안식일이니 하는 것으로 이웃을 정죄하고, 그것으로 서로를 미워하며, 그게 신앙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과장을 하거나 극단에 치우치지 않게 되기를 부디 조심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말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상성을 부인하자는 쪽으로 해석하여 또 다른 쪽으로 치우치는 빌미로 이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나는 아브라함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터부시하던 이방 여인과 혼인을 하였고, 그로부터 두 아들을 낳았다. 장인은 이집트에서 가장 신령할 뿐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이방신의 제사장이었다. 또한 사브넷바네아라는, 이방신의 이름을 가지고 나는 평생을 살았다. 또한 가뭄 때는 바로 대왕을 위하여 대운하를 건설하기도 했고, 모든 이집트 사람들의 땅을 사서 왕께 바쳐 그들을 바로 대왕의 종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하나가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민됨과 그 선민됨의 축복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해서 나는 수 없이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를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끊을 수는 없었다. 안식일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우리 형들의 신앙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미움과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에 놓여져 있는 상황이나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내부에서 속삭이는 사단의 유혹이란 사실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 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상황이나 핍박이나 사람이나 제도도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율법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도 최종적인 신앙의 척도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살아 있는 신앙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상적인 율법이나 제도의 순종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는 참된 신앙. 이것이 나의 110년의 삶이 보여주는 신앙의 핵심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언제나 통용되는 신앙의 ꡐ마스터 키ꡑ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다.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일을 시키시고, 또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 잘못 사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삶에서는 그랬다. 하나님이 내게 객관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열일곱 살 때 꾸었던 꿈이 전부이다. 그토록 많은 위험 속에 던져졌지만, 그리고 중요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많이 해야 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만큼은 아버지 야곱에게 보이셨던 친절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 그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았다는 주장을 펴자는 이야기 이야기도 아니지만.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환란과 억울한 일이란 먹구름 속에 숨어 계시는 때에라도 참된 신앙인은 신앙의 정절을 더럽히지 않고 곧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간증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의 경우처럼 아주 명백하고 세밀한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가실 수도 있고, 내 경우처럼 보디발 장군이나 바로 대왕의 입을 통하여 나와 함께 하심을 간접적으로 세상에 증명해 보이시기도 하신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우리가 할 행동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시고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우리 각자를 약속으로 또는 성숙으로 이끌어 가신다.

언젠가도 썼지만 노인의 망령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여기까지 다시 읽으면서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ꡐ한 소리 또 하고 또 다시 덧붙이는ꡑ 주접을 많이도 떨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쓰는 것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대로 두는 것이 더 편안하니, 이 일을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허, 이 요셉도 늙음을 이제 현실로 받아 들일 수밖에 정녕 다른 도리가 없단 말인가.

이 글의 후반부를 쓰면서 나는 젊었을 때에 했던 자랑으로 인해 얼굴이 뜨뜻해짐을 느꼈다. 나는 형님들에게 내가 바로 요셉임을 밝힌 후 이렇게 말했다.

"형님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요셉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셨지요? 아우 베냐민아! 너도 분명히 보았지. 그러니 형님들, 제가 애굽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어떻게 명예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형님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보신 대로 아버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110의 나이에 다시 돌아보는, 내가 누렸던 이집트의 영화나 풍성함은, 우리 생에서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나는 오히려 델타 지방에 흔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작은 꽃 한 송이가 내가 평생 입었던 총리의 옷보다 더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임을 느낀다. 그건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것이 아니던가.

같은 이유에서 나는 내가 이 글에 쓸 수많은 삶의 체험이나 교훈의 내용보다 이렇게 글자를 만들고, 그 글자를 통하여 과학과 역사와 문학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을 우리의 잠재력 안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에 더 많이 감탄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신비가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영광을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인간에게 주셨는지, 감사하고 감격할 따름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내용을 상형문자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우리 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그리고 기도하며 부탁하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말이다.

"열심히 상형문자를 공부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 말을 우리 글로 쓸 수 있을 때까지 연구해주기 바란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주기 바란다."

아, 모국어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

(월간 복음과 상황 1998년 2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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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강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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