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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준엄하게 명령합니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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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준엄하게 명령합니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 딴지 USA
  • 승인 2021.04.17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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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나’라는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필수입니다. 드라마의 식상한 클리셰인 기억상실증은 기억이 부재할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위에 서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공각기동대>는 인간과 인조인간의 구분이 어려운 미래에서 '기억'을 인간의 본질로 봅니다.

공동체 역시 그러합니다. 연인과 부부, 절친 모임 같은 최소단위의 공동체에서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공동체까지 첫날부터 이날까지 함께했던 기억이 있어 '우리'로 엮어집니다. 이를 내적 기억(internal memory)라고 해둡시다.

교회 공동체는 내적 기억을 더 강조합니다. 성경은 내내 기억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냥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해도 되는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성찬을 행하라고 하면 되는데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심은 그분이 먼저 ‘기억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대홍수 와중에 방주의 노아와 동물을 기억했고, 이집트에서 억압과 학살을 당하는 히브리인을 기억하셨습니다.

손수 택한 백성이 당신을 아프게 할 적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잊히지, 이중피동X) 아니하리라”(사 44:21). 우리는 하나님에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선포가 제 51년 인생길에서 몇 번이고 저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그에 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기억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처럼 정체성을 상실하기 쉬운 시절일수록 그러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이런 기억이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를 형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와 어떻게 동행하고 응답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나의 자매와 형제요, 내 지체가 됩니다. 하지만 내적 기억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망각에 빠진 공동체보다야 낫겠지만 내적 기억이 전부가 되면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매번 내적인 문제를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5년 후, 10년 후에도 풀리지 않는 내 문제로 내 아픔으로 거듭 회귀하듯 공동체 역시 그렇게 됩니다.

저는 이를 자기함몰성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공동체 밖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연대해야 자기함몰성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외적 기억(external memory)라고 부릅시다. 그리고 내적 기억 너머 외적 기억을 함께 품는 공동체를 ‘더 큰 기억의 공동체’(community of a larger memory)라고 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큰 기억의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자아의 문제에만 몰두하지 말고 타자의 괴로움도 기억하라고 합니다. 과거 나 자신이 애굽에서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는 행위는 현재 우리의 이웃인 고아와 과부의 곤궁함을 기억하는 행위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신 24:19~22).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 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시 9:12)십니다(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떠올리며 이 구절을 읽을 적마다 눈물이 납니다). 우리 역시 공동체 밖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억울하게 죽은 이를 기억하고 고난당하는 이의 탄식에 응답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공동체 밖의 비극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준엄하게 명합니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신 8:18)라고.

이런 기억은 그 기억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회와 그 기억을 핍박하는 정사와 권세에게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 됩니다. 우리가 위험한 기억을 품고 연대하는 더 큰 기억의 공동체로 살아갈 때에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거짓은 참을 이기지 못합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세월호를 기억하는 위험한 기억의 담지자로 살아갑시다. 더 큰 기억의 공동체로 나아갑시다.

예전에 다른 분들과 함께 낸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을 받았고, 나를 기억하라는 주님의 명을 받았다면 세월호를 기억하라는 명 또한 엄숙히 받들어야 합니다. 세월호는 망각 속에 가라앉고 기억 속에 인양됩니다. 바다 속에 가라앉거나 크레인에 인양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애도보다 기억이 더 중요합니다. 공감의 눈물은 나도 함께 아파했다는 면죄부를 주기도 하고 종종 일회성에 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한다(remembering)’는 것은 버림받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다시(re) 우리의 지체(member)로 받아들이는 행위(ing)이며, 그들을 잊었던 우리가 다시 그들의 일부가 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세월호를 영영히 망각의 검푸른 바다 속에 밀봉해두려는 ‘정사와 권세’를 위협합니다. 그 기억은 요한 뱁티스트 메츠가 말한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 되고, 그 위험한 기억을 나누는 공동체는 일본계 미국 학자 로날드 타카키가 말한 ‘더 큰 기억의 공동체(community of a larger memory)’가 됩니다. 실제로 세월호는 지역, 계층, 연령, 종교의 차이를 끌어안는 방주가 되었습니다.

성서는 준엄하게 명령합니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신 8:18)라고.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출전: 박총, “성문 밖 그리스도, 성문 밖 세월호,” 『헤아려 본 세월』, 포이에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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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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