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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찬송가' 과도히 미국 중심적.. 우리의 정서와 아픔 담아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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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찬송가' 과도히 미국 중심적.. 우리의 정서와 아픔 담아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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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0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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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개신교에서 사용 중인 <21세기 새찬송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기에 부르지 않습니다. 물론 예배에 참석해서 입을 꼭 다물고 찬송 부르기를 거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일상에서 기쁘거나 슬플 때 저 치욕의 찬송가를 흥얼거리지 않고, 저 찬송가에 제 삶의 희노애락을 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제 신앙 생활에서 찬송가를 빼앗아간 찬송가공회와 저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 시대에 성전에서 장사로 떼돈을 벌던 장사치보다 더 나쁜 놈들이 만든 찬송가를 인정한다는 건 내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 부정하고 모욕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사양합니다. 제가 <21세기 새찬송가>에 치욕을 느낀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 이 찬송 사랑하는 태도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제 찬송가 생각을 절대화하거나 그걸 구실로 타인을 차별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와 다른 취향이나 생각을 존중합니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가수 홍순관이 낸 여러 장의 음반 중 찬송가를 노래한 <양 떼를 떠나서>를 사랑합니다. 1983년에 펴낸 <통일 찬송가>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찬송을 사랑하는 그의 생각과 마음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2010년에 <뉴스앤조이>에 <21세기 새찬송가>로 상처받은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고 '절반을 미국 곡으로 채운 <21세기 새찬송가>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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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을 미국 곡으로 채운 <21세기 새찬송가>의 정체성을 묻는다'

지난해 말로 개역성경과 <통일찬송가>가 폐간되었습니다. 50대 이후 세대가 대체적으로 그렇겠지만 저 또한 <통일 찬송가>의 폐간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긴 했지만 20년이 넘도록 애환을 함께 했던 터라 <통일찬송가>의 폐간을 아쉬워하는 성도들은 꽤 되지 싶습니다. 20-30년마다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찬송가의 세계적 추세라 알고 있습니다. 1983년에 <통일찬송가>가 출간되었으니 <새찬송가>는 때맞춰 나온 셈입니다. 문제는 내용 면에서 이전보다 질이 더 떨어졌고, 교회 연합에 일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점이겠지요.

<21세기 새찬송가>만큼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찬송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2000년 11월에 첫 시제품이 발표되자 찬송가 전문가들의 분위기는 싸늘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의 작곡가 박재훈 목사는 "이대로 발간할 경우 국제적 망신을 당한다."며 100여 곡 이상의 전면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2004년의 두 번째 시제품을 거쳐 2006년에 최종판을 출판했지만 내용상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박재훈 목사는 9곡이나 되는 자기 곡을 삭제하라며 반발했고, 미주(美洲)찬송가공회는 한인교회들에게 <21세기 새찬송가>를 사용치 말자는 권고문까지 보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한국교회는 찬송가 이권을 놓고 여러 차례나 법정 다툼을 벌이며 망신을 자초했지요. 완벽한 찬송가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권과 교권 때문에 편집위원의 90퍼센트 이상이 비전문가들로 구성되면서 21세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선교 122년 만에 출간된 <21세기 새찬송가>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국적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찬송가공회는 <통일 찬송가>가 우리의 곡을 17곡만 게재했으나 <21세기 새찬송가>는 128곡(19.8%)이나 게재했다는 점을 자랑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부끄러워해야 할 통계입니다. 어떻게 세계 선교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는 대한민국 찬송가의 80퍼센트가 외국곡일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찬송가의 비율 20퍼센트도 따져봐야 합니다. 이번에 새로 편입된 111곡의 한국 곡 중에 2005-6년에 작사되거나 작곡된 곡이 28곡이나 되더군요. <21세기 새찬송가>가 출판된 2006년에 작곡된 곡도 3곡이나 됩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작 기간이 10년이나 걸렸는데 2005-6년에 작사․작곡된 곡이 28곡이나 포함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검증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 아닐까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작품의 질이 아니라 전, 현직 교단장이거나 유명 대형교회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21세기 새찬송가>에 작품을 올린 경우도 한 두건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부 목사가 가사와 곡을 쓴 경우(308, 614장)도 있습니다. 교단들이 이권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교과서에 다름 아닌 찬송가 선정을 놓고 나눠먹기를 한 것입니다. 2004년의 두 번째 시제품 찬송가 분석 결과를 보니, 한국인이 쓴 93곡 중 한국적이라고 할 만한 곡은 16곡에 불과하더군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내용을 자세하게 따질 여유도 지면도 없습니다. <21세기 새찬송가>의 외국 곡 비율이 무려 80퍼센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2006년에 출간된 우리 찬송가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것이 분명한 일본 찬송가 <고금성가집>의 자작 찬송가 비율이 23-25퍼센트이고, 미국 찬송가 <The Hymnal>의 경우는 무려 자곡곡이 88퍼센트에 이른다는 하니, 가슴이 답답할 따름입니다.

20대 80이라는 비율도 문제이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용입니다. 80퍼센트의 외국 곡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번에 <21세기 새찬송가>에 새로 편입된 외국 곡이 53곡인데요. 83년 이후, 그러니까 <통일찬송가>가 출판 이후 작곡된 곡은 불과 7곡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21세기 새찬송가>에 편입된 나머지 46곡의 외국 찬송가는 지난 20-30년 동안 작곡되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작품들이 아닙니다. 30여 곡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젊은 곡이 60입니다. 심지어 30곡 중에는 종교개혁 시대 때 작품도 끼어있습니다. 본국에서조차 사장되었거나 잘 안 불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런 곡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10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성탄 때마다 널리 불리고 있었던 곡(113장)이나, <통일찬송가>엔 빠졌다가 <21세기 새찬송가>에서 부활한 성가 ‘오 홀리 나잇’(622장)과 같은 곡들까지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처럼 400-500년 전에 작곡되었더라도 예술적으로 탁월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면 계속 불러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술적 가치도 낮고 역사성마저 의심스러운 외국 곡들이 수십 곡씩이나 <21세기 새찬송가>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정말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21세기 새찬송가>가 주체적이 아니라 사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란 증거 아니겠습니까.

저를 더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21세기 새찬송가>가 과도하게 미국 중심적이란 사실입니다. 겉표지만 바꿔 놓으면 미국 사람들이 자기네 찬송가라 착각할 것 같습니다. <21세기 새찬송가>는 총 654곡 중에 미국곡이 322곡이나 됩니다. 49퍼센트를 넘는 비율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곡 보다 2.5배 많습니다. 새롭게 들어간 외국곡이 53곡 중에 28곡이 또한 미국곡입니다. 역시 절반을 넘는 52퍼센트! 이 통계도 실감이 안 나십니까. 그렇다면 53곡의 절반도 넘게 미국이 가져간 반면 23개 나라가 25곡을 나눠 가진 게 <21세기 새찬송가>란 사실을 보면서는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앞에서 1983년 이후에 작곡된 외국곡이 7곡이라 했는데요. 그 중에 4곡을 미국 사람이 작곡했거나 편곡했습니다. 어떻게 분석해 봐도 미국의 그림자는 <21세기 새찬송가>의 절반을 덮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곡만 좋으면 그만이지 미국 곡이 절반이면 어떠냐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반미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절반이 넘는 미국 곡들로 인해 우리의 정서, 우리 고유의 가락이나 화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 현실의 고민과 아픔과 희망이 찬송가에서 설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찬송가를 부를 때 이러한 행간을 읽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 하게 하소서.”

<21세기 새찬송가> 212장 2절 가사입니다. 제 고향 집에는 조카가 자기 어머니의 한 평생을 이 한 구절에 담아 직접 쓴 족자가 걸려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앙인들은 모두 찬송가에 얽힌 깊은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 서적을 펼쳤을 때 첫 장이나 끝 장에 인용된 한 구절의 찬송가를 보면 그렇게 반갑고 가슴이 짠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 찬송가는 신앙인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대중가요였고, 또 다른 이에게는 멋진 클래식 음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찬송가가 아픕니다. 내 삶의 일부였던 찬송가가 아프니 저도 아픕니다. 교회에 갈라 치면 찬송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의 무게가 힘겨운데 이제부터는 상처투성이가 된 찬송가까지 부축해야 할 판입니다. 우리 찬송가의 쾌유를 빌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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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이 부른 찬송가 '이 세상은 요란하나'를 공유합니다.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교회 반주도 자주 하던 30대 초반까지 좋아하여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습니다. 수요일이나 일요일 저녁, 또는 금요 기도회 묵도 때 제가 많이 쳤던 곡이기도 합니다. 홍순관의 찬송가 음반에서 이 곡을 발견하고 살짝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시대에 이런 찬송가를 좋아하여 음반에 담은 흔치 않은 취향의 동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요란하나'란 찬송가는 홍순관과 저를 지금까지 형 동생으로 이어 준 어떤 끈이었는지 모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CSFqYdMx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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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강유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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