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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리뷰
빛날수록 그림자도 짙다. - 천년 구미호
 회원_318406
 2020-10-17 01:15:53  |   조회: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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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리뷰]천년구미호 - 기량

 

 

  도깨비와 구미호 중엔 구미호를 더 좋아한다. <은비까비>보다 <신구미호>가 더 좋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얀 머리에 소복차림, 묘한 눈빛의 구미호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남자든 여자든 그런 타입은 신비스러운 매력이 넘쳐난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머리 구미호 주인공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적이다.'는 칭찬만큼 묘한 칭찬도 없다. 한국인이 그린 만화에 한국적이란 말로 칭찬하다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나루토>나 <블리치>를 보고 일본적이라고 칭찬하는 기분이다. 자기 나라 색을 잘 녹여낸 것이 그 작품의 강점은 맞겠지만 이건 전통을 현대적인 센스로 잘 버무려낸 역량에 대한 칭찬이 되어야 한다. 소재가 작품의 평가를 갈라서는 안 된다. 한국적이라고 무언가 칭찬하는 걸 볼 때마다 다른 방식, 소재를 차용한 작품에게 들으라며 압박을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소재로 칭찬을 하고 싶거든 다른 소재에 대해 차라리 칭찬하자. 가령. "붓펜을 쓰다니 현명하시네요!" 혹은 "와콤 타블렛으로 그리다니 대단하세요!"

  그러니 이런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다. 보기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홍콩 할매의 국적도 모르는 사람인지라 심령과 그리 친하지도 못하다. 나는 만화에 대해 이야기 할 생각이다. 이 기령 작가가 연재하는 만화, <천년 구미호>에 대하여.

 

 

  보기만 해도 흥미로워지는 구도라는 게 있다. 이 구도란 사연과 개연성이 맞아 떨어질 때 생겨난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연과 개연성이 맞물리지 않는다면 구도는 재미없어진다. 옛날 옛날부터 천족과 마족이 싸웠다는 구도가 진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왜 싸우는 지 납득가는 설명도, 그들 개개인의 사연도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흔하고 진부해 보이는 것이다. <천년 구미호>의 시작 구도는 이런 의미에서 흥미로웠다. 주인공 반야는 천년 동안 인간 밑에서 수행을 쌓아왔고, 이번에 구슬을 찾아내지 못하면 다시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무당이 되어야 하지만, 무당이 되면 반야가 다시 천년동안 봉사해야 하기에 갈등하고 있다. 벌써부터 캐릭터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이 안 된다. 거기다 어떤 방식으로 해결을 볼지 궁금증도 생긴다. 호기심을 이끌어내기 좋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작품은 쌓아놓은 이 기대감을 조금 흔들 만큼의 액션을 다음 타선에 세운다. 이우혁의 소설 <퇴마록>, 혼세편 3권을 보면 박신부가 일본 밀교 진형 한복판에서 오오라를 모은 뒤 "주의 분노!" 라고 외치면서 적들을 제압하는 장면이 있는데 진지한 싸움 와중에 중년 남자가 외칠 대사도 아니거니와, 그 뒤에 일어나는 상황과도 매치가 안 되서 보다가 책을 집어던져 적이 있었다. <천년 구미호>가 출판본 책이었다면 집어 던지고 싶을 만큼 어색한 기술명 배틀이 이 작품에서도 일어난다. 혹자는 원피스나 나루토의 소년 만화 배틀을 들며 이런 기술명을 외치는 패턴은 뻔한 게 아니냐 물을지 모른다. 그 질문에 답하자면 액션의 몰입이 다르다.

  기술이름을 외치며 싸우는 건 어떤 장르에 만화든지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이 기술명이 어색하지 않게 만들려면 기술명을 외치는 행동 자체에서 신경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액션엔 더 압도적인 작화와, 압도적인 연출이 사용된다. 기술명을 외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다. 기술명을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천년 구미호>는 기술 명에 비해 그 연출이 시원치 못하다. 비전 인법 절! 이라고 외치고 한줄기 아지랑이가 손에서 살짝 튀어나가는 모양새는 기술명에 신경 쓰게 만든다. 한번 동작에서 떠난 집중력은 기술명을 통해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명에 신경 쓰다가 다시 액션 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작품은 좋은 시작을 끊었으나 뒤로 갈수록 아쉬운 장면들을 남겼다.

 

 

  캐릭터가 참 매력적인 작품이다. 보통 한을 품은 존재나 악역으로 등장했던 구미호의 사랑 이야기나, 무당을 다루는 소재도 신선했다. 아차, 이런 거 칭찬하면 이상하다고 방금 말한 참인데. 그러니 방금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 해보자.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장점이 힘을 가진 만큼 단점도 그 모양새를 분명히 하기에 아쉬움도 큰 작품이었다. 

2020-10-17 01: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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