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코이노니아
솔로몬이 확립시킨 ‘건축물 중심의 신앙’은 사실 신학적 발전이 아니라 퇴보였습니다
 회원_479646
 2021-01-14 03:25:24  |   조회: 220
첨부이미지

‘성전’을 뜻하는 히브리어 הֵיכָל(헤칼)은 히브리어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고대 수메르어 ‘에갈’에서 기인했다고... 수메르어에서 ‘갈’은 Great란 의미에 가깝고 ‘에’는 히브리어 בַּיִת(바이트), 곧 ‘집’을 가리키죠. 그래서 ‘에갈’은 왕궁이나 신전으로 번역되는데, 이 말이 히브리어에 들어오면서 הֵיכָל이라는 외래어로 정착되었다고...

본래 이스라엘에는 ‘신전’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어서 근동의 다른 언어에서 차용해와야 했을 정도니까요. 그 말은 신전 개념 자체가 그다지 필요없었다는 말도 될 수 있고, 애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성전(신전)과는 관계없는 분이시라는 뜻도 될 수 있겠네요. 하긴 성경을 읽어보면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과 달리 야웨 하나님의 בַּיִת는 특정한 도시 혹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분이 지으신 피조세계, 우주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의 종말론적 비전 역시 온 우주의 회복과 갱신을 통한 야웨 성전의 최종적-우주적 완성을 가리키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야심, “우리도 이집트나 아시리아 부럽지 않은 신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자.”는 생각과 그 실행은,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볼 때 절대 긍정적인 사건이 아니란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가 그분의 소유이자 거처이셨기에 오히려 장막의 형태를 지닌 ‘이동 성전’을 지으라 하셨고, 수메르의 일곱 신들과 달리 특정 도시에 예속되지 않으신 채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를 유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이름 없는 사막의 신’이라며 비웃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확립시킨 ‘건축물 중심의 신앙’은 사실 신학적 발전이 아니라 퇴보였습니다. 결국 성전은 무너졌고, 포로기 이후 유대 백성들에게서는 성전의 개념이 점차 확장되어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는 건축물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에스라-느헤미야에 이런 징후가 크게 나타나고 있지요)

건축물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최종적 비전에 따르면,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이,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처소 곧 성전입니다. 물론 저는 ‘비대면 예배’가 현 상황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신자들을 향한 도전의 시간이겠지요. 정기적으로 모이지 않아도, 잘 갖춰진 인프라와 편안한 장소가 없어도, 군중의 모습이 아니라도,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비대면 상황과 신앙의 일상성을 그저 핑계로 삼아 예배의 삶을 버릴 것이고, 누군가는 더욱 중심을 바로 세우고 예배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할 테죠.

예배란 무엇이고, 성전이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끄적여봤습니다. ‘모이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라 여겨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 드는 분들이 악한 마음으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귀하고 소중히 하는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하면서도, 그분들이 예배의 또다른 핵심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신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축제이기도 하다는 점. 하나님은 הֵיכָל의 울타리 안에 갇혀만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처가기

2021-01-14 03:25:24
97.93.156.11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풍성한 믿음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