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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 침묵으로 존중합시다
 회원_899084
 2020-10-16 03:43:02  |   조회: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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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대학 채플 시간에 한 강사가 오셔서 서서평 선교사(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간증 설교를 해주셨다.

내가 재직중인 한일장신대의 모태를 90여년 전 개척한 서서평은 독일 출신 미국 선교사로 최근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땅의 어둔 시절에 도래한 2000명 넘는 서양선교사 중에 서서평은 철저하게 조선 사람과 동화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 땅의 선교사역에 바친 진주 같은 존재이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상전 대접 받으며 거드름 피우고 기여한 것 못지않게 드리운 그늘이 많은 걸 고려할 때 이런 분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종 된 모습을 철저히 자기 몸으로 체현한 극소수의 귀한 분임에 틀림없다.

그가 오랜 세월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망각의 그늘에 가려졌던 것은 내 보기에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고, 목사 선교사가 아니라 간호사 선교사였으며, 서울 중앙이 아닌 호남지역을 위시하여 지방을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교 중 한 가지가 가시처럼 걸렸다. 서서평 선교사를 높이 칭송하기 위해 테레사 수녀와 빗댄 것이다. 한 언론사 기자가 서서평의 업적을 테레사와 견주어 평가한 것에 대해 자기가 ‘모욕적’이라고 거칠게 항의했노라고 말했다. 테레사는 자기가 남긴 일기 중에 그토록 평생 선한 일로 헌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수녀 성직자로 신의 존재에 대해 부단히 회의하는 어둔 밤을 많이 보냈다고 고백한 데 비해, 서서평은 마지막 순간까지 영생의 복음을 확고히 붙들고 말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놓지 않았다는 항변이었다.

내게 든 의문은 이런 소박한 것이다. 사람에게 말이 중요함을 알지만 그 말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대변해줄 수 있는가. 표현한 말들의 이면에 채 언어로 형상화되지 못한 내면의 진실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표현되지 못한 침묵의 진실이 언어로 표현한 것과 불화하는 경우는 또 오죽 많은가. 테레사가 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회의를 고백한 것은 아마도 그가 겪은 인도의 현실이 너무 처참하여 거기에서 느낀 신의 부재를 솔직하게 일기장에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마치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고, 시편 기자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당신이 존재한다면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방치하실 겁니까?’라는 탄식을 서슴없이 토해냈듯이, 그녀 역시 그녀의 방식으로 자신의 절망어린 심사를 내뱉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치열한 회의와 독한 의심 가운데 신에 대한 속깊은 신뢰를 드러낸 역설의 방식 아니었을까.

그렇게 표현하지 않거나 못한 것, 표현 속에 감추어진 것의 여백을 고려한다면 서서평 선교사 역시 불굴의 믿음으로 철저하게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 틈틈이 도마처럼 의심을 품은 적은 혹 없었을까. 너무 힘들어 그 인간적인 역경 속에 흔들린 경험은 없었을까. 그랬다면 그것은 그의 언어 밖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면서 한 개인의 내면에 일렁이는 생각과 욕망이 통과했을 그 모든 자취를 죄다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굳이 그 드러난 것, 표현된 것에만 집착하여 특정 개인을 추켜세우고 특정 개인을 상대적으로 낮추려 하는가.

우리는 왜 한 사람을 그 표현된 것으로 높이 예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그의 표현되지 못한 비밀을 묵살한 채, 경솔하게 깎아내려야 하는 것일까. 각자 처한 상황과 현실이 다름에도 이러한 비교를 통해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라도 되는 것인 양 그런 상대평가를 밀어붙여야 하는 걸까.

이런 사례에서 내가 느끼는 점은 우리 신앙인들의 문학적 독법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역설과 아이러니, 과장과 축약, 제유와 환유 등의 수사법을 그냥 문자적 독법으로 뭉개버리니까 어떤 인물의 말과 침묵 속에 내장된 이면의 진실은커녕 행간의 진실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팽배해지는 현상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 제 존재의 위상과 의미를 그 말로써 풍성하게 드러내고 예배와 온갖 경건의 실천마저 극장식 연기와 같이 멋지게 연출하려는 유혹이다. 예수는 그것을 ‘외식’(hypokriton)이라고 비판하고 도리어 은밀함을 강조했는데 말이다.

은밀하게 존재하고 행동하는 분으로 은밀한 중에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언행심사를 은밀한 방식으로 살피고 보응하시는 하나님! 그게 산상수훈의 예수께서 지혜문학/신학의 계보를 이어받아 최선으로 통찰하신 하나님의 실체였다.

이제 우리도 말로 표현되지 못한 것들을 침묵으로 존중해주면 좋겠다.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며 트집 잡는 식의 행태는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다. 하나의 선한 것을 추켜세우기 위해 또 다른 선한 것을 비교대상으로 묵살하거나 폄하하면서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진 은밀한 행간과 이면의 진실을 위한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최후의 심판자가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처음과 나중을 뒤집는 역전의 파격과 역설의 풍경으로 경험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몇 년 전 쓴 글인데 이 땅의 기독교신앙과 신학이 전광훈이나 인터콥 수준을 극복하기 위해 짚어봐야 할 맥점이 있어 다시금 소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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