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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죽을병에 걸린 교회
 회원_942823
 2020-09-19 04:47:50  |   조회: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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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간이 아까워 이 글로 서울 연회 감독의 목회서신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치려 한다. 진실은 사실판단에서 밝혀지는 것이지 마구 어림잡는 추정판단에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네 나라의 감독들을 만나 보았다. 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감리교회 감독이다. 한 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조그만 사무실에서 첫 대면을 했던 스티혀(Bishop Hermann L. Sticher)감독, 필리핀 감리교회 토꿰르 감독(Bishop Solito K. Toquero), 미국 중북부 레이더 감독(Bishop Sharon Rader),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 감독이다.

1.

신학대 시절 나는 유학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학비가 없는 독일에서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몇 친구들과 남산에 있는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웠다.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를 하고 있을 무렵, 우연한 계기에 독일 쾰른에 있는 한인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내가 감리교 목사였기 때문에 독일 감리교회 감독이었던 스티혀 감독이 나를 한인 교회 목사로 초청해 주었다. 하여 나는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스티혀 감독을 찾아 인사를 나누며 첫 대면을 했다.

프랑크푸르트 조용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감독 사무실에는 직원이 세 명 정도 있었다. 감독 오피스에 들어서니 퍽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그 흔한 소파도 없었다. 감독의 업무 공간은 우리 일행 3명이 함께 앉으면 꽉 찰 그런 조그만 공간이었다. 온화한 인품이 흠씬 묻어나는 스티혀 감독은 나의 가족, 현재의 형편,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의 형편을 물으며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그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자리에서 그는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떠나보내듯 배웅해 주었다.

쾰른 한인교회에서 다양한 갈등들이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온화하게 우리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다. 감독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나 오만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는 감독이 아니라 그저 온화한 목회자였다. 이후 그를 여러 번 만났지만 그의 모습과 태도는 언제나 평화로웠다. 그는 한 번 약속하면 지켰고, 상황 전모를 파악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등 언행에 매우 신중했다. 쾰른 한인 교인들도 스티혀 감독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었다. 처음 그를 방문했던 프랑크푸르트 감독 사무실에서 느꼈던 그의 온화한 이미지는 지금도 내게 잔영처럼 남아있다.

2.

연합감리교회 레이더 감독은 1997년 한국을 방문했다가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티칭 잡을 얻지 못한 한 여성 박사를 “한국교회가 쓰지 않으면 내가 데려다 쓰겠다”고 하더니 정말, 바로 그 해에 연회 회의를 거쳐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그 여성 박사를 정식 초청하여 대학이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의 담임자로 데려 갔다. 그 교회는 100여 명이 모이는 백인 교회였다. 그 여성 박사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도 전에 레이더 감독은 목회를 위하여 그 교회에 담임자로 올 사람이 탈 자동차까지 준비해 두도록 세심하게 조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여성이 해외에 나가 오래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도 남성 학자들의 세계에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그러한 한국 교회와 신학대학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여성 박사를 귀한 인적 자원으로 여겨 자기 연회로 초청해 데려간 것이다. 그 이후 그녀는 그 여성 박사의 적극적인 추천자가 되어 부단히 도움을 주었다. 레이더 감독은 자기 교구에 있는 목사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레이더 감독은 자기 연회에 있던 한 한인 목사를 눈여겨보고 중요 교구의 감리사로 전격 임명하기도 하고, 그를 UMC 감독이 되도록 뒤에서 도운 분이다. UMC 한인 감독으로 선택된 분들은 대부분 한인 목사들이 뜻을 모아 감독으로 추대되는 것이 일반이었지만, 레이더 감독의 지지를 받아 감독이 된 그 분은 한인들이 거의 없는 미국 중부에서 백인들의 합의와 추천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된 분이다.

나는 백인 목사들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적 편견을 느끼곤 했는데, 그녀는 정말이지 인종차별적 편견이 전혀 없는 감리교 감독이었다. 그녀는 감독으로 일하면서 소중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 인물이 자신의 소명을 최대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 자기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교구 목사들이 모두 알고 그녀의 판단에 대하여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엔 시카코 게렛 신학대의 레지던트 비숍으로 일하기도 했다.

3.

2005년 나는 필리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하면서 여러 곳의 초청을 받아 다양한 강연을 했다. 그해 필리핀 마닐라 연회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열렸을 때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을 무렵, 이방인이었던 나의 눈에, 이름을 외우기 어려워 잊었던, 그 당시 마닐라 지역 감독이었던 그가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젊은 목사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특이한 모습이 띠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몇몇 목사들을 찾아다니면 손에 돈을 쥐어주고 있었다. 마치 나이든 권사님이 가난한 목사에게 돈을 찔러주듯이. 한 사람에게 건네주면 부인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감독에게 건네주고, 감독은 또 다른 목사를 찾아 그에게 돈을 건네주고... .

연합감리교회에서 봉급을 받는 필리핀 감독은 자기가 받은 봉급의 일부를 가난한 자기 교구 목사들에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내 곁에 있던 유니온 신학대학 신약학 교수인 보나벤투라 교수가 내게 그 광경을 웃으며 설명해 주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필리핀 유니온 신학교 교수들의 월급은 당시 100불에서 150불 정도였다. 차를 가지고 있는 이는 학장인 로미 뿐, 어느 누구도 차가 없다. 한 달에 150불 받아서 어찌 사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서재에는 책이 거의 없다. 교수마다 계란이나 육류를 얻기 위해 닭이나 칠면조를 키운다.

몇 군데 필리핀 지역 교회를 주일마다 방문해 보았는데 그들은 정말 너무나 가난했다. 그 중에서 극빈의 동료 목회자를 기억하고 감독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기 봉급의 일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던 것이다. 그는 가난한 목사에게는 자애가 넘치는 아버지 같은 감독이었다.

4.

내가 만난 감독들 중에서 단연 많은 이들이 우리 한국 감리교회 감독들이다. 1979년부터 목회를 시작한 내가 유학 가기 전까지 가장 가까이 했던 분은 배 모 감독님이다. 그 분은 전도사 시절, 전도사들을 불러 식사도 대접해 주고, 우리가 헤어질 때엔 자기 기사에게 터미널까지 잘 모셔다 드리라며 차를 내 주시곤 했다. 그 다음에 내가 가까이 뵌 분들은 내가 감신 교수가 된 후 감신대 이사나 이사장이 되어 이따금 회의를 하러 오시는 감독님들이었다.

당시 이사회는 회의를 호텔에서 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사회를 마치면 학교에서 소정의 여비 봉투를 마련해 파일에 넣어 드리곤 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회의실에 가보면 여러 분이 탁자 위에 여비 봉투를 그대로 놓아두고 가셨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 기획처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 당시 이사장은 나 모 감독 이셨다. 그 분은 학교 인사나 재정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총장에게 일임했다. 총장이 자신보다 학교와 교수를 훨씬 더 잘 안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 때만 해도 우리 교수들은 감리교회 감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경했다.

그 이후 이사들이 교체되고 정치 장로들도 이사로 들어왔다. 백주년 기념관을 지은 후 사사건건 총장을 괴롭히는 이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거의 막무가내 깡패 수준의 행패를 부렸다. 한두 시간도 안 걸리던 이사회 회의가 한없이 길어지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 지켜보는 내게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모일 때마다 똑같은 문제를 물고 늘어지던 장로도 있었다. 국회에서 법조문을 정리하던 전력이 있다는 분이었다. 정치 장로라는 사람이 저런 인물이로구나를 실감한 때다.

그 무렵, 새로 이사로 들어온 감독 중의 한 사람이 여비 봉투를 열어 본 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던지더니, 감독을 뭘로 알고 이따위로 대하는 거냐? 라며 호통을 치던 일도 있었다. 남쪽에서 온 구 모 감독이었다. 정치 장로, 못된 감독 때문에 온갖 모욕을 겪은 총장은 건강이 좋지 않아 이사회가 끝나면 총장실에 누워 한두 시간 분을 삭이며 쉬어야 했다. 그 총장은 병원에 건강을 체크하러 갔다가 예상하지 못하던 곳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이후로 나는 이사회에서 총장들이 이사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사장이 교수 인사권을 가져가고, 심지어 보직 인사권까지 빼앗아 학교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특정 교수를 불러 위협하던 이사장, 나에게도 전화를 걸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했던 감독도 있었다. 이후로 이사회는 학교보다 고급 호텔에서 열리는 경우가 빈번해 졌다.

교회나 지방회, 그리고 연회에서 본 감독들의 모습은 정말 여러 모습이다. 어느 감독은 설교하러 왔다가 설교만 하고 봉투를 받아 챙긴 후 예배 중 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도 강단에서 사라진다. 다른 약속이 겹으로 있기 때문에 장소로 급히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주일이 일주일에 하루인 것이 아쉬운 분이다. 교회에서는 감독이라서 보통의 경우보다 더 많은 액수를 준비해 드린다. 지방회가 열리면 감독들이 인사차 들른다. 지방 서기와 회계는 봉투를 준비했다가 감독만이 아니라 동행한 총무에게까지 봉투를 건네는 관행도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독일이나, 미국이나, 대만이나, 필리핀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물론 여기저기서 받은 사례비를 자신이 취하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뜻 깊고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감독들도 보았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자기 중심의 탐욕을 이기지 못했다.

감독은 자기 교회에서 봉급을 받고, 연회에서 활동비와 자동차와 기사를 기본으로 제공받는다. 세월이 잠간 지났을 뿐인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교에 보내온 외부 장학금 털어 자기 판공비처럼 졸업생들에게 양복을 사주며 선심을 쓰는 감독도 겪었다. 은퇴하면서 교회를 털어간 감독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한 감독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광화문에서 난동을 부리던 무리와 유사하게 현 정권이 기독교를 탄압한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방역법을 어기는 범법행위도 마다하지 말고 대면예배를 드리자는 해괴한 믿음을 가진 감독까지 나왔다.

그는 민주사회가 법치사회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좌파 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극도에 달한, 극한의 한계 상황이라고 현실을 정치적으로 읽는 것일까? 나는 이런 유치한 시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에서 공인된 교단의 감독이 취할 태도로서 신학적, 윤리적, 법적 타당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5.

내가 만난 감독들 중에는 정말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가하면 도저히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될 탐욕스러운 사람이 감독이 되어 신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스스로 저버리는 감독들도 보았다. 가난한 목사가 감독이 되기 위하여 돈 많은 평신도로부터 후원을 받아 입후보하고, 돈많은 평신도에게 아들의 선교지에 억대 후원금을 보내게 하며, 교회가 방역법을 어겨 벌금이나 구상 책임이 있을 경우 돈 많은 장로가 뒤를 댈 계획이 있다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감독이 정말 감리교 감독이 맞는가?

하나님은 과연 돈 있는 장로 뒤에서 감리교회 감독이 일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길이 우리 사회에서 감리교회가 반정부적 집단으로 매도되고, 현 정부를 곤경에 빠지게 하려는 정치적 행태를 보일 때, 우리는 그저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한스 큉은 가톨릭교회의 구태를 파헤치며 “과연 교회가 구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Ist die Kirche noch zu retten?)”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한스 큉은 자신이 평생 섬기던 가톨릭교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가톨릭교회는 병들었다. 치명적인 병이다. 그런데도 치료받으려 하지 않고, 병을 감추면서, 침묵하고 있다.”

아멘 소리와 칭찬만 듣던 귀에 이런 진단은 무척 역겹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에서 감리교회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재의 상황은, 펜데믹으로 인해 반년 이상 고투를 벌이고 있는 방역 당국과 정부가 펜데믹을 막기 위해 아이들의 학교 교육받을 기회도 제한하고, 영세 상인들의 가게 문을 닫게 하고, 교회의 대면예배를 일시적으로 금하자는 결정을 한 정황이다. 전 국민, 특히 가난한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시제에, 정부의 고뇌에 따른 결정을 이해하고 협조하기는커녕, 이를 좌파 정권의 음모에 따른 “기독교 탄압”이라며 자의로 추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감리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필경, 정부의 결정에 정면충돌하는 “대면예배”를 드리라며 선동하는 감리교 감독이 정말 좋은 감리교 전통에 서 있는 감독일 수 있을까? 이런 어이없는 독선적 행보를 비판하는 소리를 광우병 반대하던 좌파들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간주하는 그가 과연 세상을 제대로 읽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의 감리교회도 깊은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한스 큉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감리교회는 병들었다. 치명적인 병이다. 그런데도 치유받으려 하지 않고, 병을 감추면서, 침묵하고 있다.”

 

출처:https://www.facebook.com/ck.park.18/posts/3777719568908296

2020-09-19 04: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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