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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수국을 보면 눈물이 난다
 회원_631742
 2022-07-03 13:24:28  |   조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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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수국을 보면 잘 삶아 곱게 말아 놓은 국수 대접 같다 했다. 할머니는 수국을 보면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아,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하셨다. 그런데 나는 수국을 보면 눈물이 난다. 눈물을 한 사발 말아서 들이켜듯이 내 안에서 장맛비 같은 눈물이 목구멍을 막는다.

우리집 뒷곁 모퉁이에 아름드리 수국이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만개하여 장맛비에 젖어 고개를 떨구는 꽃이 수국이다. 내 기억에 수국은 물과 연관되는 꽃이다. 빗물이 아니라 눈물과 연관된다. 내 아픈 기억이 수국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뒷집은 무당집이었다. 용하다는 소문이 나서 인근각처에서 점을 보고 굿을 하러 오곤 했다. 굿을 하는 날을 제외하곤 참 조용한 집이었다. 그 집의 막내딸은 나보다 두 살 아래, 담벼락을 넘어간 수국이 뒷집 우물가에 꽃 사발을 내려놓으면 그 아이는 수국을 따서 소꿉장난을 하곤 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서로 내외하며 쑥스러움을 탄 탓에 말없이 보내던 어느 날, 수국 그늘 아래 그 아이 우는 소릴 들었다. 신내림을 받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갈등이 있었다는 풍문을 나중에 들었다. 그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울음이 그것과 관련 있는 것처럼 생각됐다. 지금도 수국을 보면 그 아이가 꽃그늘 아래 흐느끼던 소리가 들린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난 장손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집안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 과도하게 집중됐다. 하지만 내 여동생 둘은 가난의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으로 보내졌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야간학교였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축사 같은 방직공장에서 강도 높은 단순노동을 하고 학교라는 이름으로 밤늦도록 붙잡혀 있어야 하는, 그 삶이 어린 누이에겐 많이 힘들었던 게다.

누이가 집에 오던 어느 날, 비가 내렸다. 추적거리는 빗소리에 실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끔하게 열린 뒷방 문틈 사이로 하얀 수국이 흐드러졌다. 그 아래 누이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수국 아래 슬리퍼를 신은 누이의 발등이 부어 있었다. 장시간 서서 고된 노동에 지친 누이의 삶이 곰팡이 핀 개떡처럼 부풀어버린 것이다. 수국은 환장하게 흐드러져 하얗게 웃고 있는데, 누이의 눈은 봉숭아빛으로 붉어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속상할까봐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저 혼자 수국 아래 앉아 흐느끼는 어린 누이를 보는 내 눈 또한 봉숭아꽃처럼 붉어졌다.

그 뒤로 난 수국을 보면 눈물이 난다. 어린 누이의 봉숭아빛 눈물이 수국에 그렁그렁 맺혀서 내 눈가에 와르르 쏟아진다. 나에게 수국은 아픈 꽃이다. 바늘 끝처럼 아프다. 수국을 보면 하얀 고봉 쌀밥이 생각나는 할머니나, 한 대접 수북이 쌓아올린 국수가 생각나는 어머니나, 모두 상처 입은 이 땅의 어린 누이들이다.

나에게 수국은 가난과 상처의 상징이다. 눈물의 상징이다. 헤어날 수 없는 어린 영혼의 속깊은 울음이다. 그래서 수국을 보는 일이 나에겐 참 아프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든 게 수국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들의 눈물을 봐야 하는 일이고 그들의 바늘 끝 같이 찌르는 아픔을 안아야 할 때다.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는 게 수국을 보는 것처럼 아리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신성시하며 종교적 관념으로 대한다. 어떤 목사님은 평생 십자가를 제조해서 나누는 일을 한다, 젠장. 하지만 나는 십자가가 아프다. 정말 아프다. 사람의 아들이, 아니 누군가의 아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해 시신이 매달린 그 나무가 나에겐 성스럽고 고귀한 종교적 상징물이 아니라, 그를 낳은 어머니의 아버지의 찢어진 가슴이다. 십자가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며 절규다. 비켜갈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아픔이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아픔과 절규를 보지 못하는 자는 신의 형상도 볼 수 없다. 사람의 아들 예수도 헤아리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을 헤아릴 수 있는가. 타인의 아픔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십자가는 나에게 유효하다. 예배당이나 종교적 의례를 위해 조각된 십자가, 그리고 액세서리로 걸린 십자가 따위에 무슨 영험한 힘이 있겠는가. 그건 종교적 관념을 상징화시킨 하나의 물건들일 뿐이다. 그것은 십자가일 뿐, 십자가가 아니다.

수국을 보면 눈물이 난다. 그런데 십자가를 보면 너무 아프다. 사람의 아들, 살과 뼈 사이로 피가 흐르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한 인간, 순수한 영혼을 가진 한 젊은이를 참혹하게 찢어버린 인간의 야만을 십자가에서 난 본다. 그 야만에 짓밟힌 가난한 육체, 그 찢긴 육체 앞에 통곡하고 절규하는 어머니를 본다. 그래서 난 십자가를 보면 뼈가 저리게 아프다. 십자가를 쳐다볼 수가 없다. 온몸이 찢기고 피 흘리며 죽어간 한 생명이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그가 피흘리며 죽어간 인간임을 알았을 때 그는 비로소 나의 구원자가 됐다.

수국이 눈물이 되었을 때 난 비로소 사람을 알게 됐다. 사람은 얼마나 아픈 존재인가, 사람은 얼마나 슬픈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얼마나 깊은 존재인가를... 그런 것처럼 신이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을 통해 신을 보게 된다. 인간의 아픔과 눈물을 이해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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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3 13: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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