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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왜 교회에 오는 이들은 약한 자들, 사회부적응자들일까?
 회원_940900
 2022-07-03 13:23:10  |   조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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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 거듭 들었던 얘기. 사실,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다. 터키에서도, 태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인도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여성들. 소수 민족들. 정서적으로 약한 청년들. 노인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어떨까? 많이 다른가?

왜일까?

약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 앞에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복음이 그런 이들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초대교회의 중심에 중산층이 있었다고 본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개신교에 눈을 돌린 이들은 신흥 귀족들이었다. 구한말과 일제 가운데 복음에 눈을 뜬 조선인들도 중산층들과 지식인들과 청년들이었다. 사회 안에 새로운 질서와 변화를 원하는 이들이 복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선교사들이 돈을 주기 때문에, 크리스챤들이 일하지 않고 돈을 기대하는 종교인들이 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 역시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돈을 줘서 실적을 쌓으려는 병든 종교인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오기에, 도와줄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약자들이 교회로 찾아오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과 중산층들과 지식인들이 복음으로 오지않는게 이슈겠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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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복음의 왜곡 때문이라고 본다. 선교사들의 경우, 근본주의성이 강한 이들이 많다. 그들의 편향된 복음이 특정 사람들 만을 초대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 유대인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다. 그들이 함께 공유한 전제는, 복음의 사회성이었다. 다윗의 나라는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생태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단위는 나라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에는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였다.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이 집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종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개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이라는 것, 더 나아가 우리 역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인이라는 점은 잘 몰랐었다. 예수교의 혁명적 접근이다.

복음은 이 양면을 모두 갖고 있다. 복음의 사회성. 그리고 복음의 실존성. 문제는 .... 현대인들은 복음의 유대교적 뿌리를 서양식 개인주의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즉, 복음을 개인화하고 사유화하나, 복음이 갖고 있는 사회적 변혁성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복음은 이 뿌리를 떠난 적이 없다.

현대의 찬양과 시편과 이사야의 찬양을 비교해보라. 현대 찬양은 온통 개인의 죄의 회개, 사랑의 갈구, 자기 연민. 내세의 갈구로 가득하다. 그러나, 시편이나 이사야에 나온 세계의 변화, 자연의 화답, 나라의 회복,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소망 등은 현대 찬양에서 아예 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개인적 복음에 목마르다. 죄책감. 소외. 외로움 등등.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를 간구한다. 어떤 이들은 이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서 천당에 가고 싶다. 개인화된 복음은 이런 자들에게 복음이 될게다. 거기에 맞는 이들이 기독교로 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간구한다. 이 새로운 종교는 무엇을 말할까? 그 신앙에서는 어떤 경제와 사회적 변화, 생태적 개선, 공의와 회복을 얘기하는지 알고 싶다. 이런 이들에게 개인적 복음이 이상하기까지 하다. 이 땅의 우리 삶과 이런 개인적 위안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왜 그런 탈세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에 귀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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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전하신 총체적 복음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번 한국 대선을 보며 마음이 많이 상했고 여전히 회복 중이다. 원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되지 않음 때문이 아니다. 그 후보가 되었다고 많이 달라졌을까?

사실은 교회 때문에 속상하다.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년이 넘는 한국 교회. 그러나, 사회적 변화에 대한 해석이 오히려 100년 전보다 더 후퇴한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적 성찰은 더욱 개인적 차원과 종교적 게토 안으로 들어갔다. 실제 삶과 사회 현상들의 이슈에 대해서 복음으로 해석해 본 적도, 시도한 적도 없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복음이 정치나 사회와 연결되서는 안 된다고 믿고 주장까지 한다. 

2024년에 한국에서 로쟌대회를 한다니 한마디 하자. 대회도 좋지만, 먼저 1974년 로쟌 언약, 그리고 1975년 이를 풀이한 존 스토트의 해석을 읽길. 복음주의 반성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더듬고. 회개하자.그리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 온전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의 복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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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3 13: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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