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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깊이 알수록 더 모르는 것 같습니다
 회원_707744
 2022-05-19 02:42:27  |   조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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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목회자를 만났다. 적지 않은 세월, 인연이 이어졌던 분이다. 교회 일을 그만두고 난 후, 목회자들을 거의 안 보고 지냈는데 그와는 가끔 연락을 하곤 했다. 긴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이십년 가까운 세월, 수 없이 설교 하고 말씀을 전했는데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 깊이 알수록 하느님에 대해, 진리에 대해 더 모르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 서서 무언가 말 하는게 참 어렵다.”

엘에이 한인 교계에서 설교 하나로 유명세를 얻었던 목회자들이 몇 있었다.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오직 그 말씀만 듣겠다며 쫒아다니는 추종자들도 적지 않았던 양반이다. (개인적으론 설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거나 설교자를 추종하는 현상을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 어찌됐든 오랜 세월 설교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졌던 사람의 고백인지라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적당히 포장하는 겸양의 말씀을 주고 받는 사이도 아닌지라 마음 속 깊은 회한과 번민에서 우러 나온 고백이란 걸 알아 차렸다.

교회 개혁 한답시고, 건강한 교회 이루겠다며 열정을 품고 일하던 시절의 나였다면 “지치셨나 보네요. 다시 힘을 내서 잘 감당하시길요.” 뭐 이런 되도 않는 썰을 풀었겠지만, 한 동안 교회와 목회자를 멀리서 지켜 봐서 그런지 그 말이 마음에 와 닿더라. 어쩌면 스스로 실패와 번민, 침잠과 포기의 세월을 보내서 나서 들은 말이라 더 공감이 갔는지 모르겠다. 말 없이 공감의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은 나 역시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고백을 종종 한다. 익숙하던 기독교라는 틀을 넘어설 때면 내가 알던 하느님과 진리, 삶과 고통, 나와 타자, 죽음과 영원의 의미가 낯설게 다가 온다. 낯설은 공부와 상념이 계속 될 수록, 깊은 침묵 속에서 신비의 조각을 슬쩍 맛 볼 수록 ‘정말 모르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옛 말에 ‘도라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 했다. 나의 경험으로 이해하는 하느님은 (온전한) 하느님이 아니고, 내 사고의 틀로 규정되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닐 수 있는 거다. 그 목회자의 ‘모르겠다’는 말은 진리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의 다른 표현, 혹은 ‘궁극적 실재’와의 존재론적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투명한 고백이 아니었을까.

내가 제일 경계하는 이는 진리를 다 아는 듯, 심지어 진리를 소유한 듯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다. 요즘은 현실에서 만날 일이 거의 없지만, 에고들의 치열한 각축장인 페북을 보다 보면 그런 이들을 종종 만난다. 자기 확신에 사로 잡혀 확고한 말로 ‘진리’를 설파하거나 팬덤과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만만한 말을 던지는 이들. 그가 목회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말로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이거나 진리를 만난 적도 없는 아둔한 자, 둘 중 하나일 게다.

그러한 이들이 위험한 이유는 ‘자기 왕국’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조종하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 부흥, 선교, 하느님 나라, 교회 개혁, 건강한 교회 등등... 무슨 비전을 가져다 쓰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건 사명이란 미명 안에는 그네들의 야망이 감추어져 있다. 자기를 드러내고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자기애적 욕망과 구멍가게라도 자기가 다스리려는 권력욕 말이다. 진보건 보수건, 규모가 작건 크건 상관 없이 어디에나 있다. 그들의 감추어진 야망인 ‘사명’을 이루는 와중에는 대개 주변 사람들이 피폐해 지기 마련이다. 15년 교역자 생활과 5년 기독교 단체 활동을 하며 수 없이 보고 겪었던 일들이다. (부끄럽지만 사명감에 가득 차 일하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공허한 주장에 별로 휘둘리지 않고 그런 부류도 어렵지 않게 분별한다. 비전, 사명을 입에 달고 살거나,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심이거나, 자기 확신에 사로 잡혀 기필코 자기 뜻을 관철 시키려는 사람. 세상 일에는 야망을 가지고 앞장서야 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신앙과 구도의 길은 버리고 비우는 연습이다. 보여지는 포장에 속지 말고 애초부터 저런 이들을 멀리 하는게 좋다.

앞에서 말한 목회자는 어찌 보면 자기 왕국을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입장이었다. 돈과 힘을 가진 이들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다 그는 부유한 이들을 멀리 하려 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이들 곁에 있었다. 때론 홀로 은둔하며 숨어 버리기도 했다. ‘모르겠다’는 말을 고백하는 사람이기에 그러한 자기 비움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나와 여러모로 다름에도 여전히 그와 마음을 나누는 이유다.

그가 부탁을 했다. 팬데믹이 잦아 들면 대면 예배로 모여야 하는데 좀 도와 달라 한다. 외로울 때 마음 나눌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게 다 였다. 어떠한 뜻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계획도 없다. 아마 그랬으면 “잘 되시길 바랄께요”라며 거절했을텐데, 옆에 좀 있어 달라니 아무래도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교회 일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엮이다니. 인생 사 모를 일이다. 선한 사람이 도와 달라는데 돕는게 하늘의 뜻 같기도 하다. 물 흐르는대로 주어지는대로 감당할 수 있으면 하는거 아니겠나.

늘 그렇듯 계획하지 않았던 길이다. 길.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거기를 향해 나아 가는 길. 때론 달리고 때론 멈추기도 하지만 머물지 않고 걸어 가는 길. 길 위의 벗들과 우정을 나누며 소박하게 가는 길. 그 길의 여정을 꾸준히 가면 되는 거겠지. 교회 안 일이건, 교회 밖 일이건 상관 없이.

그래도 이왕 교회 일을 한다면 확고한 신념과 불같은 사명 따위는 내려 놓고, 야먕을 사명으로 포장하지 않고, 모르면 모르겠다 인정하면서 좀 즐겁고 쒼나게 했으면 좋겠다. 별 볼일 없는 자가 사람들 앞에 서야 할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송구한 마음이 하릴 없이 일어 난다.

 

 

https://www.facebook.com/gopemu/posts/1022204177004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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