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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빛나는 순간', 진정한 치유는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회원_956053
 2021-11-29 11:59:25  |   조회: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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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빛나는 순간>>

진정한 치유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요즘은 심리학 혹은 상담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학문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도 어느 틈엔가 일상에 깊숙하게 파고들어 와 이모저모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정한 패턴을 따라서 범주화하는 방식으로 대중화되어 마치 과거에 혈액형에 관심을 보이듯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인간이 그렇게 단순하게 범주화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보다 엄밀한 프로그램을 따라서 혹자의 경우,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치유를 꾀하겠다며 자신의 과거를 찾아서 여정을 시작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유행하는 심리학 구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삶의 병리적인 현실은 과거 어느 시점에 가진 깊은 상처 때문이어서 다시 그 지점에 돌아가서 그 상처를 드러내 살피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야만 해결된다는 심리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상담학의 치유 방책 때문이다.

이런 학문적인 저변의 확장은 다양한 영역에서 적용을 꾀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곤 한다. 며칠 전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영화의 세계가 이런 관심사를 반영한다고 생각되었다. 작년에 제작되어 올해 6월에 개봉된 영화 <<빛나는 순간>>인데, 제주 출신의 소준문 감독이 그려낸 일종의 치유 영화로 볼 수 있다. 고두심이 분한 고진옥과 지현우가 분한 경훈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간다. 진옥은 60대 초반이고, 경훈은 30대 청년이어서 세대 간 차이도 노정된다. 제주도가 고향인 진옥은 1948년 어느 동굴에서 자신이 우는 바람에 발각된 부모가 총에 맞아 숨지는 일을 겪은 한 많은 여인이다. 어찌어찌 살아남아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은 오랜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지내며 진옥의 병시중을 받고 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자신과 함께 해녀 되어 수입을 보태게 하려고 바다로 이끌었으나 비극적으로 바다에 묻히고, 사진만 안방 화장대에 놓여있다. 미소 가득하지만, 그 안에 한이 담겨 있다. 한을 내면에 숨긴 채 숨죽여 사는 진옥의 기막힌 삶을 담은 액자인 셈이다. 제주의 비극과 진옥, 그다음 세대인 딸과 경훈이 중첩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 호탕한 진옥은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마음에 “깊고 묵직한 상처”(trauma)가 있어 매사 중력처럼 작용한다. 요즘 말로 “웃픈” 그녀의 미소엔 그 상처의 흔적이 아른거린다. 경훈은 방송국의 피디로서 제주 해녀인 진옥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한다. 경훈이 등장하면서 진옥이 그 상처의 과거로 마지못해 걸어 들어가게 된다. 선뜻 응하지 않는 진옥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계기를 찾던 경훈이 진옥이 물질하는 바닷가를 찾게 된다. 수영하던 경훈이 무언가를 본 듯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과 함께 무력해진 채 물속으로 가라앉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진옥이 그를 구하게 된다. 아련하게 실종된 숨을 되돌린 것이다. 둘은 돌연 친밀해지는 계기를 갖게 된다.

진옥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 그녀의 삶에 깊은 공감을 갖게 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연인을 바다에서 비극적으로 잃었던, 그 광경이 떠오르며 바닷속으로 가라앉던 경훈의 상처가 진옥과의 관계에서 건드려지면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경훈이 어렵사리 자신의 과거를 꺼내 진옥과 깊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진옥도 침잠되어 있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내는 계기를 맞게 되고, 이로써 둘 사이에는 심리적인 깊은 연대(rapport)가 형성된다. 3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를 딛고, 둘은 서로를 자신의 삶에로 받아들인다. 서로의 상처에 대한 심리적인 유대감 혹은 일체감을 경험하는 과정으로서 “입맞춤”이라는 장치가 사용되지만,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남녀 간의 애정을 넘어 한 인간이 마주한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으로 승화되는 지점이다. 외부인과 내부인의 경계를 넘어 오해와 억측을 용해하는 화해의 순간이기도 하다.

경훈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사랑한다”는 고백에 진옥은 기존의 삶과는 다른 삶의 전망을 보고 거기로 넘어가게 된다. 60을 넘긴 여인은 살아오는 과정에 누구로부터도 마음이 담긴 고백인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부모에게서도, 딸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단어이다. 부모를 잃었던 그 비극의 현장인 바로 그 동굴에서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경훈의 고백이 진옥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한 것이다. 부모를 잃은 슬픔을 넘어서, 자신의 울음이 원인이 되어 발각돼 총살된 부모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경훈의 고백에 중첩되어 부모의 마음으로 전이되면서 수용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치유된 것이다. 경훈의 말에서 부모의 말을 듣게 되는 경험이 일어난 셈이다.

자신의 울음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넘겨지던 부모의 심장에서 콸콸 쏟아진 그 뜨거운 피의 느낌을 가진 채 죄책감으로 살아온 삶, 주위의 이웃이 건네는 “진옥아, 네 책임이 아니야”라던 말이나 다른 어떤 위로로도 치유되지 않았던 내면의 비극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주면서 서서히 깊어지는 과정에 인격적인 공감을 이루었던 경훈의 고백에 의해서 만져진 것이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는 기묘한 순간, 한 맺힌 자신의 삶이 받아들여지는 경험, 더 할 수 없는 죄책이 해결되는 순간을 맞닥트린 것이다. 움츠린 삶이 수용되는 일이 빛처럼 뚫고 들어온 것이다. 받아들여지는 경험, 수용되는 경험, 여기에서 치유의 힘이 발현된다. 아마도 감독은 진옥을 통해서 제주의 희생자의 한을 인격화하여 품으려고 했을 것이고, 사회적인 치유의 길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치유”(sanatio)는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필자의 스승인 아드 퐌 에흐몬트(Aad van Egmond)는 자신의 은퇴기념논문집의 제목(Heilzaam Geloof, 2001)에 “싸나치오”의 의미를 담았다. 진정한 “싸나치오”는 어디에서 가능한 것일까에 대하여 그는 “신적 사랑에서”(Die von Gott ausgehende Liebe)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다섯 살일 때, 고전적인 항구도시이자 자신의 고향인 로테르담에 쏟아 부어진 포탄의 굉음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말한 일이 있다. 산산이 무너진 음울한 도시, 그 안에 부모와 남편과 자식과 친구를 잃고, 삶의 터전이 산산이 부서지어 내팽개쳐진 망실한 사람을 치유하는 진정한 힘은 신적 사랑의 깊이를 드러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읽었던 것이다. 반대로 이런 정황에 빠트린 가해자들에게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신적 용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 치를 수 없는 빚처럼 산적한 죄와 그 죄책의 깊이와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누추한 죄인의 죄를 조건 없이 담당하여 죄인의 죽음을 친히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자신의 누추한 죄가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죄책에서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동시에 희생자로서 자신들을 희생시킨 자들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수용의 힘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비극의 한가운데서 가해자와 희생자가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길, 과거의 상흔을 싸매어 치유되어 화해되는 일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죄인을 위하여 내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의 섬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신적인 긍정과 용서가 공존하는 사건이어서, 그 안에서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령께서 한과 죄를 그 깊이에서 드러내어 맞닥트리게 함으로써 절망에 사무친 인간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공되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빛처럼 순간적으로 인식의 깊은 세계로 파고들어 올 때, 인간은 자신의 한을 내려놓게 되거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자신을 수용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불가능한 일을 감행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성령이 일깨우는 “싸나치오”에는 인식론적인 개방이 충족되어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런 구체적인 이해에 수반되는 깊은 열정이 움직여져야 하고, 그리하여 이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치유된 삶의 시작이 포함되어야 한다. 말을 바꾸어 “싸나치오”는 전인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받아들이고, 그 안에 서는 것에 상응하는 바,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전인격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결단하는 일을 “신앙”이라고 부른다(고전 15:1-11). 이런 신앙에는 치유(Heilzaam Geloof)가 수반되는 것이다.

전인격적인 일로서 “싸나치오”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성별도, 나이 차이도, 삶의 조건도, 기존의 관계도 모두 용해된다. 하나님과 맞닥트리는 순간에 이런 차원은 모두 용해되어 사라진다.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의 용광로에 담금질하는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지복의 순간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전환되는 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통하여 신적인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unio mystica cum Christo) 신적인 사건에 완전히 빠져서 몰아적인 황홀경에 이르러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삶의 장(場)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생겨난다. 자기 동일성이 확보되면서 이성이 온전히 작동하고, 감성이 제자리를 찾으며, 사리를 분별하고 자신과 자신의 삶이 회복되는 길을 찾아 나서는 역설적인 상황이 뒤따른다. 은혜는 자연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며 회복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어 다시 자신의 삶에로 되돌아가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꾀하게 되는 일인데, 일종의 기적이다. 치유된 경훈은 제주에 남을지 서울로 돌아갈지를 고민한 끝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경훈은 진옥에게 서울 동행을 제안한다. 진옥은 고민한다. 일체감(rapport)에서 빠져나와 자아 동일성(Self-Identity)을 회복하는 필연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고민 가운데 가방을 꾸리고, 망설이며 딸의 사진을 가방에 담는다. 그리곤 안방을 나와 남겨질 병든 남편이 누워있는 문밖에 서서 서성인다.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전화가 온다. 공항으로 직접 간다고 답한다. 망설이던 진옥은 공항에 가지 않았고, 경훈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닷가로 향한다. 그곳에서 경훈은, 진옥이 자신이 선물로 건네준 분홍색 테왁을 안고 물질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물속에서 이별을 전하는 진옥의 모습을 보며, 경훈은 미소를 띤 채 공항으로 돌아선다. 치유된 진옥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병들어 누워있는 남편 곁에 머물러, 바다에서 죽은 딸 사진을 다시 꺼내 제자리에 놓는다. 자신을 살게 한 바다를 배경으로 죽은 부모의 흔적이 있는 곳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남은 진옥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진정한 “싸나치오”가 일어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용광로에서 새롭게 빚어진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사역자로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래 살던 그 삶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단히 실적을 다투는 직장으로, 복작복작 속 끓이는 소박한 가족 구성원의 관계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직면한다. 치유된 자로서 치유하는 삶을 꾀하기 때문이다. 다시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주변을 보듬는다. 포용하고 일으켜 세우는 삶, 치유하여 새로운 미래를 여는 삶을 도모하는 것이다. 과거의 죄나 죄책감을 끌어안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그런 범주의 삶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자유한 자의 삶이기 때문에, 마지못한 삶의 궤적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내면의 강박에서부터 비롯되는 삶의 차원을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에서 비롯되는 그런 삶의 궤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진옥이나 경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이 없지 않다.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을 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지향성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앙에 수반되는 치유하는 힘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한 예를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2-17절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 그 전형을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에, 그러니까 믿기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현재에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그 풍성한 은혜를 인하여 사도로서의 직분에 충성을 다 하고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신앙의 치유하는 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임하셨는데, 자신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자임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한다. 자신의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는데, 그 은혜의 크기로 말하자면 자신은 죄인 중의 죄인임을 자처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고백은 받은 바 그 은혜의 정도에 있어서 자신이 최고의 혜택을 받은 자임을 고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송축하는 고백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같은 이런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자신을 넘어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을 자들에게 본을 삼으려고 하신 일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송영을 돌리는 그의 실존적인 고백에서, 과거의 상처로 되돌아가서 골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바울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은 좀 자연스럽지 않다. 말을 바꾸어, 바울의 이 고백에서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우울한 모습을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것은 바울의 자서전적인 고백의 맥락을 놓치는 일일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자신의 삶을 치유한 그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고 있으며, 그 은혜를 받은 사람 중에 누구보다 자신이 으뜸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능가하는 은혜를 송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마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삶 전반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임을 확신하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와 길이를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다잡아 새롭게 노정하는 일을 지속했다. 성령이 일깨우시는 그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새롭게 미래의 소망으로 현재를 품으며 일상을 도전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던 삶의 어느 순간에, 바울이 갑자기 떨치고 일어나 치유의 길을 나선다며 굳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과거의 기억조차도 구속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잡아서 옥에 넣었던 사람들, 매질했던 사람들, 자신이 친히 그 죽음의 증인이 되었던 스데반에 대한 기억 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조차도 구속되었을 것이다. 환언하여 그때의 기억이 선연하였을 것이나, 그것으로 인하여 죄책감을 구체적으로 느끼며 과거로 되돌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독론적으로 재해석되어 깊은 곳에서부터 복을 빌어주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고후 4:10). 종말론적인 시간의 구조 안에서 삶을 새롭게 읽었을 것이다. 비록 돌무더기에 묻혀 죽었으나,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를 인하여 보좌에서 일어나 그의 영혼을 품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스데반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던 것처럼, 그 삶의 행복을 성령 안에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날에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 가운데 붙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롬 8:31-39).

물론 바울이 인정머리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과거로 돌아가 어떤 죄나 실수나 상처를 끄집어내어,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을 인하여 일부러 고민하며 낙담한 지경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요셉이나, 다윗이나, 그 외 여느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이 인식론적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삭케오처럼 자신의 삶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돌아볼 사람을 기억하고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삶을 새로운 전망에서 재설정하여 건강하게 풀어가는 방향을 노정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추구해야 하는 자요,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어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그 일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때 이미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피상적인 양육 때문에 이런 전망을 구체적으로 직면하고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이 경험되지 않았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칭의가 공유되지 않아서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일환으로 봉사하거나 기도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성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기반으로 전인적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섬기는 수고는 양무리에 마음을 두고 전심으로 섬기는 목회자의 열심을 통하여 강단에서 일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힘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이해 지평을 구체적으로 열어주는 설교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형제자매를 지적으로 일깨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내포된 약속을 공감하고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회중을 섬기는 설교는 피상적이기보다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선언적이기보다는 양육적인 차원을 깊숙하게 담지해야 하는 것이다.

ps., 이보다 더 진전된 병리적인 문제의 해결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이나 정신분석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 별도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더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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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9 11: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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