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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from Protestantism] Ep. 01 '성전 정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원_145739
 2020-10-31 04:00:36  |   조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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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중반부에는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던 모든 사람들을 내쫓고 환전해주는 이들, 제물을 팔던 사람들의 자리를 엎어버린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성전 정화' 사건이라 부르지요. 예수님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의 간악한 자들을 때리시고, 그들을 내쫓아 성전을 깨끗하게 만드신 일이라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 일 후에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상들이 다 사라졌을까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 없죠. 이후에도 두들겨 맞았던 그 상인들은 곧바로 다시 자리를 찾아 돌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뭔지 드러내셨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성전 파멸'의 예고를,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아예 ‘정화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장사치들을 내쫓으신 후 당신을 따라 그곳으로 온 장애인들을 치유해주십니다(14절). 제가 아는 바로는 당시 성전에 장애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의 기자가 굳이 그렇게 기술한 이유는, 성전의 진정한 모습과 기능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마태복음의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예배)를 원활하게 드리기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대제사장 가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의 욕망을 채우는 '건물'이 아니라, 억눌린 모든 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질병과 가난의 장벽 아래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임재, 진정한 성전이라는 사실을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고한 종교체제를 기반으로 삼고 거기에 기생하여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던 서기관들은, 저 남루한 행색의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그들의 견고한 울타리였고, 저 바깥 부정한 자들과는 격이 다른 자신들의 정결함을 보증해주는, 그들만의 천국이었습니다. 바깥 세상은 제국의 압제와 수탈로 인해, 그리고 대지주들의 횡포로 인해 지옥도가 펼쳐져 있는데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지옥도 한 가운데 서서 마귀들을 내쫓으며 아프고 소외된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어떤 청년의 존재는,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 전에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지요. 성전 체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로마 황제의 통치라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구제금이 되어야 했던 헌금(하나님의 것)이 황제와 그의 총독부에 상납되고 있는 데도(가이사의 것), 그들은 외면했던 것입니다.

전문적인 성서학자도 아닌 제가 깜냥에 맞지 않는 이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이유는, 오늘날 개신교계의 행태가 마치 이천 년 전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종교중독자들의 모습을 꽤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성전을 향해 사망선고를 내리고 결국 무너지게 했던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또다시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 지칭하고 거기에 기생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들을 구제하고자 교회당 보증금을 빼서 나눠준 목사를 ‘성전을 파괴’했다며 정죄하고, 성전 자체를 우상화했던 대제사장의 무리를 좇아 ‘예배’를 절대 신성화하여 마침내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래 전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고, 비둘기를 팔던 자들에겐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전세 반 세겔은 팔레스타인 땅 북쪽의 ‘두로’에서 주조된 동전만을 사용했으므로, 성전에 방문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환전상들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성전까지 오는 동안 제물로 드릴 동물(비둘기)이 상하거나 분실될 수 있으므로 차라리 성전에 와서 제사장들이 지정해준 상인에게 비둘기를 사서 제사로 드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는 인간의 탐욕이 교묘하게 개입되고 있었습니다. 성전 내에서 장사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상인들은 대제사장의 가문에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단순히 성전에 상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님을 분노케 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종교지도자들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행태, 성전을 빌미로 ‘종교 장사’를 벌이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타락한 모습이 그분을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는데, 그 강도는 상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유대)이라는 신정사회 전체를 정의롭게 지탱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의 정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성전은 소수의 기득권자들을 위한 장소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떨까요? 교단과 교파들이 얼마나 큰 재력과 정치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예배 혹은 교제나 구제의 편의를 위한 각종 시스템과 직책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과거 대제사장의 가문이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종교적 기득권자들이 그런 존재들과 교묘하게 각종 이권들로 결탁해 있다는 점이지요. 사회적으로도 잘 나가는 사람들, 재력이나 권력을 지닌 이들이 유독 ‘장로’로 많이 뽑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주요 직분을 차지한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사업수완을 발휘하는 행태가 많이 목격되는 건 왜일까요? 이런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칭찬하실까요, 아니면 이천 년 전에 하셨던 것처럼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실까요?

교회가, 개신교가 과연 정화될 수 있을까요? 회복될 수 있을까요? 언젠가부터 제 삶을 이끄는, 도무지 떨쳐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신실하고 정의로운 신자들이 많고, 훌륭하고 탁월한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만 해도, 제 동기들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 다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신교라는 거대한 종교는 이제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드네요.

간혹 뉴스엔조이 기사 같은 곳에서 보이는 “고송합니다(고신이라 죄송합니다).” 라는 말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저는 개신교인이란 사실이, 심지어 목사라는 사실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 공간에서도 교회, 교단 욕 많이 했죠. 앞으로도 할 거고요(ㅋㅋ). 하지만 저는 저희 교단을 정말 사랑하고, 제가 개신교 목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크게 갖고 있기도 합니다. 양가감정이 항상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애증이라 해야 하나...

그런만큼 복음서를 읽으면, 아니 성서를 읽으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우리가 성전 삼아온, 사랑하는 교회가... 이젠 정화조차 될 수 없고 무너져야만 할 것 같아서. 성전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결국 공존하지 못했던 것처럼, 개신교라는 성전이 있던 황폐한 자리를 다른 공동체가 채워가는 모습을 우리가 목격하는, 아니 그 자리에 직접 서는 세대가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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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31 04: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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