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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M 운동, 강자의 편법과 타협, 그리고 극단주의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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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M 운동, 강자의 편법과 타협, 그리고 극단주의자 예수
  • 딴지 USA
  • 승인 2020.06.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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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과 소극적인 침묵의 입장을 견지하며, 예수의 정신보다는 법의 테두리 안에 숨어버리는 교회에 실망하며 글을 적습니다. - 마틴 루터

 

1. 박정희 군사독재 말기인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사회는 소위 ‘긴급조치’로 설명해야 이해가 된다. 그것이 학교 캠퍼스에선 더욱 그랬다.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징집된 것을 포함한 나의 대학생활은 10여년이나 대학 언저리에 있었지만 결국에 학교(학부)를 뉴욕시립대학에서 끝냈다. 미국의 학부(Undergraduate)는 나에겐 정말로 쉽지 않았다. 거의 만2년을 나는 미국의 인종(현대)사에 관심을 집중(책읽기)했다. 미국의 흑인역사를 이해하면서 나는 미국에 사는 소수계임의 입장(Identity)을 명확하게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덕분에 나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소수계 권익운동에 전념할 결심을 했고 그러한 일에서 모국어를 떠난 나의 Life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거기에 전념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갖기도 하는 것이 나의 정직한 모습이다.

2. 지금 미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BLM(Black Lives Matter)운동을 잘 이해하는 일은 소수계로 사는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정말로 중요하다. 혹자는 시위대로 인해서 생겨나는(눈에 보이는 무질서..?) 혼란을 보면서 흑인들의 주장이 억지처럼 들리고 시위대의 요구가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지한 행태로 비판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전적으로 역사를 모르는, 미국사회의 작동방식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BLM운동을 이해하려면 노예란 신분에서 해방을 스스로의 투쟁으로 쟁취한 흑인들의 역사적인 자긍심과 자존심을 이해하는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1960년대의 Civil Rights(흑인민권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그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후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결집해서 만들어 낸 저들의 정치력을 알아야 한다. ( 지금 내가 열중하고 있는 한인정치력을 결집하고 신장시키는 일(KAGC)도 바로 이 흑인민권운동의 역사에 그 맥이 닿아 있다는 긴장을 나는 잠시도 늦추지 않는다 ).

3.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사에는 그 중심에 두 사람이 아주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 ‘말콤 엑스(Malcolm X)' 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다. 말콤과 킹은 과격한 흑인 분리주의와 온건 통합주의를 각각 대표한다. 이 두 사람의 운동 노선인 분리주의와 통합주의는 한국 학생운동권의 두 노선인 ‘NL' 과 ’PD'의 차이만큼 확연하게 다르다. 킹 목사는 ‘착한 흑인’이었고 말콤은 ‘나쁜 검둥이’였다. 같은 시기에 미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 둘은 결코 만나지 않았다.

( 말콤과 킹은 꼭 한번 직접 만났었다. 1964년 3월26일 연방상원의 민권법안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의사당 로비에서 잠시 만났다 : 사진 )

그러나 이 둘은 생애 마지막에 자신들의 투쟁 방식에 한계를 느꼈고 상대를 인정했으며 협력을 모색했다. 킹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위험을 깨달았고 말콤은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 달라’며 사실상 킹의 합법 투쟁을 지지했다. 말콤은 1964년 ‘ 백인은 천성적으로 사악하다는 생각을 버린다“고 선언했고 그 이듬해 그는 암살당했다. 킹 목사의 꿈은 미국의 대도시 곳곳을 돌아다녀보고 그리고 베트남 전쟁터에서 악몽을 목격한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님은 미국의 흑인 공동체에 마틴과 말콤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했다. 말콤은 미국에서 가장 화가 많이 난 흑인이었다. 그에게 양키들은 ’파란 눈을 가진 악마‘였다. 말콤의 아버지는 백인 테러 단체인 KKK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말콤은 소년원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뉴욕 할렘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는 건달이요 마약중독자요 뚜쟁이었고 절도범이었다. 무장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은 전과자였다. 그는 ’흑인이 과연 사람인가?‘란 고민을 하면서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갖추어야 할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을 떴다. 말콤은 자기가 속한 집단(흑인커뮤니티)의 지도자가 되었고 인격이 완성 된다. (미국서 소수계로 자기 정체성을 명료하게 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나는 말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말콤 엑스‘에 푹 빠졌을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시간이 나면 말콤이 늘 머물면서 일상을 보냈던 맨하탄 125가의 할렘을 자주 다녀보곤 했다. ( 지금도 언론에 가끔 오르내리는 유명 시인인 ’고은‘선생도, 고인이 된 ’이영희‘선생도, ’송건호‘선생도 나는 뉴욕의 다른 곳이 아닌 맨하탄 125가 할렘으로 모시고 갔었다. 1988년 1989년의 일이다 ). 2007년 가을, ’바락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이 이 뉴욕 할렘의 ’아폴로극장‘에 와서 흑인지도자들에게 대통령출마를 보고(선언)했다. 나도 초청을 받아서 그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리가 뉴욕의 흑인 거물들이 한번은 ’힐러리 클린턴‘을 데려다가 정견발표를 듣고 한번은 ’바락 오바마‘를 불러서 그의 생각을 듣고 하는 자리였다 ( 클린턴이 워낙 흑인들에게 잘했기 때문에 흑인들이 당시에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이 많았었다 )

( 사진은 맨하탄 125가의 아폴로극장. 할렘르네상스의 본산 )

4. 2017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극우 인종주의가 극성스럽게 살아났다. 2016년 트럼프선거는 그 인종주의를 불러 일으켜서 백인들만의 지지세를 결집했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범죄 집단으로 발본색원 된 것으로 알았던 KKK( Ku Klux Klan )가 모습을 드러냈다. KKK 뿐만 아니라 백인우월주의를 신봉하는 각종 인종집단들이 공개적으로 시민사회에 얼굴을 내고 소수계(유색인종)들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5월25일 미네아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찰에 의해서 사망한 바로 그 하나의 사건만이 문제가 되어서 인종시위가 전국으로 번진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많은 흑인들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혐의가 없는데도 범죄인 취급을 받고 살해 당하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2010년 때부터 대도시 소수인종 사회에서는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공권력(주로 백인경찰들)에 공포심이 팽배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경찰의 총탄에 사망하는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의 숫자가 너무나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2014년, 2015년에 벌써 BLM는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5. BLM운동이 과격하다고, 또는 법과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위험시하는 여론이 있으며 한인들도 대부분 그러한 여론에 동조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도시 게릴라전이거나 어떤 무장 세력의 발호가 아닌 이상 약자의 과격함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약자(소수)가 과격해지는 이유는 그 이면에 강자의(다수의) 편법(반칙)과 탐욕, 심지어는 그들의 폭력이 반드시 먼저 있음을 경험했다. 강자(다수)의 힘은 쉽게 반칙과 편법을 은폐하는 수단이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역사를 이해하는 지적능력) 살펴보지 않으면 단편적으로만 정당성을 규정하게 된다.

6. ‘코비드19’으로 인해서 주일날 교회가는 일이 생략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 나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 한다’란 말에 비교적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교회예배에 직접 참석할 때를 기다린다. 교회의 분위기로 뒤를 돌아보는 일(회개하는 일)을 하고 그리고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고백해서 인정해 주심을 요청 드리고 싶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의 목사님 설교가 좀 깝깝하다. 세상에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데 그에 대한 말씀이 아예 없다. 거룩하고 성결하게 세상과 성도를 구분하는 일만 강조한다. 그래서 뉴욕의 주일날 아침에 ‘마틴 루터 킹’목사가 앨라배마의 버밍햄시 감옥에서 당시 시위대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오늘 주일날에 페이스북 친구들과 이 킹목사의 편지를 함께 나누고 싶다.

7. ‘마틴 루터 킹’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엘라바마 주 버밍햄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비폭력 시위를 주도하고 스스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963년의 일이다. 감옥에서 그는 그가 이끄는 비폭력 직접행동과, 시위가 현명하지도, 적절치도 못하다고 교회 지도자들이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 걱정을 했다. 특히 버밍햄의 교회지도자들은 킹 목사가 아틀란타에 사는 외부인으로 버밍햄에 와서 시위를 주도했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인종차별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법에 따라 행동하도록, 너무 성급하게 바꾸려 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고 킹목사 자신에게 우려와 충고를 하는 것도 알았다. 이에 대해 킹 목사는 조목조목 그에 대해 반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과 소극적인 침묵의 입장을 견지하며, 예수의 정신보다는 법의 테두리 안에 숨어버리는 교회에 실망하며 글을 적습니다. ” 고 하면서 킹 목사는 이어지는 글에서 자신을 극단주의자로, 과격분자로 몰아세우는 그들에게,

“ 예수도, 바울도, 예언자들도, 마틴 루터도, 링컨도, 사랑에 있어 극단주의자였습니다. 나는 극단주의자라는 그 낙인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

킹 목사는 또 “ 법과 체제의 테두리 안에 순응하지 말고, 그 체제의 사슬을 과감히 뚫고 진리와 자유를 향한, 진정한 교회 정신을 구현해야 합니다 ”고 했다.

60여 년 전에 킹 목사가 감옥에서 쓴 이 말은 시대와 장소가 바뀐 오늘날 지금 우리의 땅, 우리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증오와 무관심에 맞서는, 더 깊은 사랑과 진리의 극단주의자가 되는 길이라 확신한다.

 

출처:https://www.facebook.com/dongsuk.kim.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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