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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진짜 목회자' 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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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진짜 목회자' 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딴지 USA
  • 승인 2022.12.1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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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 개척교회 목사가 무슨 일만 있으면 페북에다가 글을 썼다.

교회 월세가 없어 아이들이 놀 공간이 사라질 위깁니다, 난방비가 없어 아이들이 춥습니다, 전기세가 없어 성도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등등, 주로 교회 재정에 관한 글들이었다.

이것이 차츰 변하다가는 나중에는 교회 승합차가 필요하다며, 이걸 무상으로 줄 사람 없냐는 글까지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착한 성도님들은(비꼬는 거 아님) 이 목사에게 원하는 것들을 다 퍼 주셨다.

월세도, 전기세도, 난방비도, 자동차도 모두 다 사주셨다.

이 때, 정말 이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 교회의 성도들도 아니고, 페북으로 안면만 텄을 뿐인 사람을 믿고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나눴다는 것이었다.

아직 교회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이 분들을 통해 깨치는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혜택을 받은 목사는 늘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재정이 채워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가지가) 생겼다."

라는 말을 남겼다.

단 한 번도 성도들 덕이라고, 당신들이 아끼지 않고 후원해 주어서 교회 필요가 채워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난, 결코 이것이 헌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님들은 헌금하신 것이지만, 그 목사는 앵벌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러기를 수년.

그 교회는 여전히 페북을 통한 앵벌이로 채워지는 교회였다.

어느 날, 일상과도 같은 앵벌이 글이 올라왔다.

"~~~~~~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길 믿습니다!"

이렇게 글을 올렸는데 그 날은 좀 다른 날이 되었다.

어느 한 사람이 충격적인 댓글을 올렸다.

"OOO 목사의 하나님은 페이스북 이구만."

그 뒤로 이 앵벌이 목사는 분노의 댓글을 달고 자신의 입장을 주절주절 길게 올리더니, 한 주 정도 뒤에 다시는 페북에 도움 글을 올리지 않겠다는 강경한 글을 올렸다.

그래, 그렇게라도 정신 차리면 되는 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월 후, 교회가 월세 보증금 인상 문제로 이사가게 생겼다며 다시 앵벌이가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또 도와줬다.

그 사람이 "목사님"이기 때문이었다.

목사는 굉장히 서러운 사람들이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쳐 학업을 수행하고 나면, 박봉이라고도 못 할 최저생계비 이하의 월급을 받으며, 노동자로서도 인정 받지 못해 4대 보험은 커녕 최소한의 경비조차도 보장 받지 못한다.

그러다 병이라도 생기면 돈이 없어 그냥 죽어야 한다.

그러니, 살려면 앵벌이라도 해야지 않겠나.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하면, 목사가 돈을 밝힌다며, 거저 얻은 것을 거저 주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어째서 교회에서 돈을 받아 쳐먹냐? 면서 분노한다.

성경을 반도 공부하지 않은 무식한 인간들 반박하기도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저런 말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진보적인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더 절망적이다.

말만 진보, 진보 외쳐댈 뿐, 내가 만난 진보적인 인물 중에서 정말 진보적인 사람은 몇 없었고, 그냥 똑같은 인간이 다른 척 할 뿐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결국, 그 자리에 지가 앉아야 한다는 말 밖엔 안 된다.

그런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성경 그대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면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성경은 문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겠기에, 고행과도 같은 공부로 말씀의 깊이를 찾아가고자 하면 영성을 모른다고 한다.

내게도 방언, 신유, 예언, 교사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맹세하건데, 나는 정말 누구보다도 많은 영적 체험을 가지고 있다.

그 은사의 갈급함의 최종에 있는 것은 말씀이었고, 말씀 그대로의 말씀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나는 이미 체험을 얻는 신비의 영역은 마음 속에 비밀로서 간직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중 나와 정말 친근한 몇 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나의 영적인 깊이에 관해서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교만이라는 프레임 하나면 나라는 사람의 모든 신앙을 해석하고 설명하기에 충분했다(그러니, 난 진보와 보수 차이를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난 내 어려운 상황을 신앙적인 면 외에는 거의 나눈 적이 없다.

도움을 바라는 뉘앙스를 풍긴 적도 없고, 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재정에서 한참 부족한 재정을 이만큼이나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자 성도님들의 헌신이라며 "자랑"까지 했다.

내가 교회에 전 재산을 쏟아 부었으니, 교회는 내 것이고 내 덕에 세워졌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누가 보든 안 보든, 한 구절, 한 문장이라도 쓸모가 있을까 싶어 내 공부를 나누기를 아끼지 않았고, 내 연구의 결과물들을 나눴다.

설교가 길고 지루하다는 불평을 많이 들었음에도, 난 여전히 최소 열 시간 이상의 공부를 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정말로 온 힘을 다해서 설교한다.

설교를 마치고 난 후에는 정말 녹초가 되어, 집에 가면 기절하듯이 잠이 들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신대원을 들어갔을 때, 친구에게 한 말이 있다.

"우리 공부는 해서 남 주는 거잖냐. 공부해서 남주자. 이게 우리 삶이잖아."

그러니, 누가 진짜 목회자로서의 삶을 사는가?

난, 내 설교가 형편 없다고 평가를 들을지라도, 교만하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단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진보인척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앵벌이하지 않았다.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 하나님 외의 것, 사람들의 돈을 의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람의 손을 거쳐 주어지는 도움들은 무조건 최우선으로는 그것을 주신 분을 향한 칭찬과 감사였고, 그 후에 그 분을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가졌다.

단 한 번도 내 능력 때문에, 내가 어떠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도님들의 헌신일 뿐, 나라는 사람은 그것들을 받을 자격이 없고 무관하며 무관함에도 주어진 것이 기적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앵벌이 목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목사님으로 칭송 받고, 난 교만한 놈이다.

사람들은, 현대의 한국 교인들은 현상과 사건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 명확하게 인식되는 것, 선명하거나 정확하지는 않아도 좋아 보이는 것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목사 다운" 목사를 규정하고, 그 규격 안에 있는 사람을 맞춤하여 "목사" 라고 부른다.

그런 입맛에 맞는 목사에게는 재산도 아깝지 않다.

한 편의 설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10년, 20년의 공부와 고행의 시간을 거쳤는지는 돌아볼 가치가 없다.

그저 좋은 대학을 나왔는가, 유명한가, 유학판가,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가,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가 만이 필요할 뿐이다.

진리를 전하는 사명자인가, 교회를 수호하는 소명자인가, 목숨을 걸어 성도를 이끌고 밀어주는 자인가는 이 모든 "보이는 것들" 뒤에 위치할 뿐이다.

그러니, 현대 청년들의 결혼 사정과도 같이, 일단 외모와 조건이 갖춰져야 그 뒤에 나오는 말들이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신학대학에서의 전도사들은 이 "조건"을 갖추기 위해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 성장학" 같은 근본 없는 공부를 배우고, 줄을 만들고 세워서 윗 선에 대려고 발버둥 치고, 성도들에게 맞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가면을 만들어 그 뒤에 숨는다.

정성과 전력, 이런 말은 신학대학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박사과정 2년을 수학하면서,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공부를 시간을 가졌다.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를, 정말로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많은 공부를 했다.

그 공부를 하면서 나와 동료들이 깨달은 것은 우리가 해냈다 거나 우리가 경지에 다다랐다 가 아니라, 더 깊은 슬픔과 고뇌였다.

하나님의 세계와 말씀은 이토록 깊은데, 이토록 했음에도 여전히 밤과 같이 어두운 지경인데, 빛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교회에는 가짜와 앵벌이들이 판을 치니, 우리가 서야 할 곳은 어디인가 였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만, 발버둥 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교만으로 규정되고 목사 같지 않은 놈들이라고 단죄 되어 버리니, 우리가 깨달은 본질은 과연 쓸모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작은 발판 하나만 되어도 만족하겠다 했지만, 정말 발판으로나마 쓰일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필요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맞을까?

그러니, 그러니, 누가 진짜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겠는가?

내 삶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성도가 없고, 재정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것 이다.

그러니, 난 끝까지 "교만한 놈"으로 남아 내 목숨으로 교회를 수호할 것이다.

감히 예수님을 닮겠다는 말은 버거워 입초에도 올릴 수 없으나, 바울의 길을, 흉내나 낼 수 있겠는가만은, 그 길을 따라는 가 보겠노라고 교만을 떨 것이다.

난 앵벌이가 아니라 "교만한" 목사가 될 것이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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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atan Caleb Kang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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