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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최종길 교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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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최종길 교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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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2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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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대의 무간도

 

<무간도>라는 홍콩 영화가 있어. 신분을 감추고 범죄 조직에 잠입해 오랫동안 일원으로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경찰과, 반대로 범죄 조직의 일원이지만 경찰에 침투해 정보를 캐내는 사람이 주인공이야. 오늘 아빠는 영화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 <무간도> 같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전해인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해.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됐고 연임 제한을 없애서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대통령에 앉을 수 있게 했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했으며, 헌법도 무시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내릴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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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사법·행정 3부 위에 군림하면서 헌법도 나 몰라라 할 수 있고 그걸 평생 해먹을 수 있는 자리. 이게 뭘까? 왕(王)이지. 유신체제가 국민을 짓눌렀지만 저항의 목소리는 터져 나왔어. 1973년 10월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일어난 유신 반대 시위는 물꼬를 튼 사건이었지. 이 시위는 서울 법대, 상대를 비롯한 전국 대학으로 번져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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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서울대 법과대학에는 최종길이라는 교수가 있었어. 독일 유학생 출신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 소리를 들었던 이 영민한 교수는 학생들이 흠씬 두들겨 맞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 교수회의에서 이런 발언을 해.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 학교에 정보기관 요원들이 상주하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말은 직통으로 중앙정보부(요즘의 국정원)에 보고됐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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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얄궂게도 중앙정보부에는 이 최종길 교수의 동생이 있었어. 동생 최종선은 중앙정보부 공채 수석 합격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의 핵심 부서인 감찰실에 있었지. 4남2녀 중 막내였던 최종선은 둘째 형 최종길 교수를 지극히 존경했다고 해. 본인의 우상이었다고 말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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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는 상관의 호출을 받아. “자네 형님에게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배경으로 한 간첩단 사건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해. 수사 와중에 어찌어찌 독일 유학생 출신인 최종길 교수의 이름이 언급된 거지. 하지만 동생 최종선이나 형 최종길이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어쨌건 중앙정보부 엘리트 요원의 형에다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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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형님, 동생 직장 구경도 할 겸 한번 들르시지요”라고 전했고 형도 “허허 내가 중앙정보부를 다 와보는구나” 하고 웃으면서 중앙정보부로 걸어 들어갔어. 퇴근 무렵 동생은 현관에서 형이 맡겨놓은 주민등록증을 발견해. “아직도 조사 중인가.”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조사’하는지를 알았던 그이기에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뭔 일이 있을까 싶어 퇴근했고, 다음 날 아침 출근했는데 뜻밖에도 주민등록증이 그대로 있는 걸 발견한다. 동생의 가슴은 내려앉았지. 형의 주민등록증은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 자리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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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인 10월19일 동생은 아침 일찍 나오라는 호출을 받아. “오늘 새벽 당신 형이 조사 도중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어.” 현장 보존 따위는 초장부터 없었고 시신은 이미 어디론가 치워진 상태였어. 자살이라니.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형이 자살이라니. 경황 중에도 그는 형이 자살했다는 곳을 찾아 샅샅이 눈에 담고 주변을 살핀다. 핏자국 하나 없는 투신 현장에서 그는 직감해. “형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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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가장 먼저 중앙정보부에 요구한 건 형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거였어. 중앙정보부가 늘 하던 대로 간첩 누명을 뒤집어씌우거나 반역자 딱지를 붙이지 말아달라는.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황망한 각서를 요구한다.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의 생명을 끊은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그 죄상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호적에 기재되지 않는 등 사상적 제한이 없이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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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처럼 숭배하던 형이 자신의 일터에서 죽임을 당하고, 명예를 지킨다는 것이 되레 형을 반역자로 인정한 ‘각서’로 귀결됐을 때 동생의 심경은 어땠을까. 이때 최종선은 뜻밖의 선택을 해. 세브란스병원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한 거야. 중앙정보부마저도 손댈 수 없는 백색의 벽 안에 스스로 갇혀서 그는 형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을 하나하나 정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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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형님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워 대대적으로 보도한 어제 저녁, 쇼크를 가장해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감시 범위에 남아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내가 뜻하는 글을 제한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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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정보요원답게 모든 기억을 짜내고 정황을 분석한 노트를 작성한 뒤 그가 뭘 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다시 중앙정보부로 돌아갔어. 1981년 퇴직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일했단다. 너는 못 들어본 말이겠지만 ‘신원조회’라는 게 있었어. 본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사상 관계, 범죄 여부 등을 면밀히 조사해 까딱 어긋나는 게 있으면 공무원이나 군인은 꿈도 못 꾸는 시절이었지. 그런데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죽음을 당한 간첩 혐의자의 동생으로서 7년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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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듣기로, 동생은 누구보다 정교한 정치 공작을 펴고 형처럼 잡혀온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대하는 등 중앙정보부원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다고 해. “형을 봐서라도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말이야. (이 부분은 여러 번 전해 들은 바 있으나 고인의 동생분 본인이 직접 부인하셨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해야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으로부터 비롯된, 와전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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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형의 죽음과 관련된 자료를 계속 모았다고 하지. 형을 죽인 원수들과 함께 근무하고 술도 마시고 명령을 받아 성실히 수행하고 칭찬도 받고, 그러면서도 형의 죽음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7년은 대관절 동생 최종선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어떤 영화든 소설이든 그 한을 표현할 수 있겠니. 세상없는 명배우라도 이 기구한 정보요원의 심리를 제 연기로 묘사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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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고 최종길 교수 사건의 공소시효를 며칠 남기고 모든 자료가 공개됐어. 재수사가 이뤄졌지만 결국은 ‘증거 없음’으로 끝났지. 당시 한 검사는 자신을 방문한 동생을 ‘가해자로 조사받을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착각하고서 “고생 많으십니다. 그냥 대충 덮는 거지요 뭐”라고 지껄였다가 동생의 허파를 다시 한번 뒤집었단다. 2006년에야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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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영화에 나오는 머나먼 나라나 고릿적 이야기 같지? 아니야. 아빠가 세상에 나온 뒤의 일이고 최종길 교수는 네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야. 아무나 끌고 와서 간첩을 만들 수 있었고, 그러다가 죽으면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자살”로 몰아갈 수 있었으며, 그에 하등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악마들이 판치던 지옥(‘무간도’란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 가운데 가장 맨 밑에 위치한 지옥이야) 같은 시기는 그리 멀지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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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어제가 10월 19일. 최종길 교수의 기일이었다. 몇 번의 선거를 더 하든 나는 이 유신을 반성하지 않는 집단, 그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은 찍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경멸할 것이다. 동시에 그 당시의 사고방식.....빨갱이라고 낙인 찍기 좋아하고, 조리돌리기 좋아하고, 악마 만들기와 마녀 사냥을 즐기던 사고방식도 그만큼 혐오할 수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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