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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윤석열, 그 더러운 손을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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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윤석열, 그 더러운 손을 치워라!
  • 딴지 USA
  • 승인 2021.07.21 0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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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다급해졌다.

지지율이 급락하자 부랴부랴 광주를 찾았다.

코로나 대유행 속에 떼로 몰려가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윤석열을 바라본 광주시민의 시선은

분노를 넘어 능멸에 가까웠다.

..........

이 이야기는 41년전 핏빛 광주와

41년후 윤석열이 찾은 광주의 이야기다.

..........

1980년 5월18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화창한 봄 날.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거리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총을 든 군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조금 뒤 피의 참극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도 잠시...

공수부대 현장 지휘관이 돌연 진압명령을 내렸고,

군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시민들이 달아나면 골목과 건물안으로까지 쫓아가

두들겨패고 붙잡아갔다.

많은 시민들이 쓰러지고 죽어나갔다.

시민들은 “이대로는 모두 죽겠다. 맞서 싸우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열흘간의 5월 광주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

광주는 항쟁기간에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은

한술 더 떠 "폭도들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고

가짜뉴스를 퍼트렸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진실이 알려질 테지만

당시 군사정권과 비굴한 언론의 정보 왜곡에

광주의 진실은 한 걸음도 광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철저히 고립된 광주...

카뮈의 소설 속 페스트로 인해 고립된 도시처럼,

코로나 발생 초기의 중국 우한처럼,

당시 광주는 철저히 고립됐다.

..........

계엄군은 이튿날인 19일부터

광주시민들을 본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작전장교가 M16을 발포했다.

광주를 피로 물들게 한 최초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피 맛을 본 계엄군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조준 집중사격을 하고

닥치는 대로 무차별 폭행을 했다.

말 그대로 ‘인간사냥’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씨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다.

옷을 찟는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에 집중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

온갖 표현들이 얼핏 떠오르지만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철저히 고립된 광주의 소식이

대학가로 조금식 퍼져 나갔다.

당시 유시민은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다.

유시민은 겁없이 광주를 유혈진압한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다.

당시 유시민은 3학년생이었다.

..........

2021년 7월17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지지율 하락에 위기감을 느낀 윤석열이

선택한 곳은 광주였다.

광주를 찾아 '극우 이미지'를 탈색하려는

정치적 꼼수가 깔려 있는 행보였다.

코로나 대유행 속에 떼로 몰려와

5·18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뒤

광주를 찾은 소회를 밝히며 갑자기 울먹(?)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광주시민들의 표정은 싸늘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서울대 2학년이었던 윤석열.

1년 선배인 유시민을 비롯해 온 서울대 학우들이

광주 유혈진압을 규탄하며

목숨 걸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맞서 싸울때

윤석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그가 40년후에 돌연 광주에 나타나

악어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더욱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동행한 지지자들의 추태는

광주시민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시민들은 "오죽 다급(지지율 폭락)했으면,

그동안 자신이 한 행동을 망각한채 광주에 나타났겠냐"며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는 처음 본다고"고 분개했다.

결국 윤석열은 광주일정을 마저 소화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의 후예 '국민의힘'과 손잡고

백범 김구,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에 뿌리를 둔

민주정권 전복을 꿈꾸는 윤석열.

그런 그가 광주에 나타나 쇼(?)를 연출했다.

'광주의 정신' 마저 지지율에 이용하려한 후안무치.

성난 광주 민심에 오히려 기름을 부었다.

대학시절 모의 재판 운운하며

마치 민주투사 인양 '코스프레' 해도

서울대 동문과 호남인들은 그의 실체를 다 알고 있다.

광주 시민들은 윤석열에게 묻는다.

80년 봄, 유시민 등 학우들이

목숨걸고 전두환 정권에 항거할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왜 '광주정신'을 당신의 정치야욕에 이용하는가...

장모의 온갖 불법혐의를 모르고 있었나?

혹시 그동안 '수사 마사지' 한 것이 아닌가?

쥴리(라마다 르네상스호텔 나이트클럽 접대부)가 아니라는

부인 김건희(옛이름 김명신)의 주가조작 혐의를 몰랐는가?

쥴리(라마다 르네상스호텔 나이트클럽 접대부)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부인 김건희의 논문표절 의혹과

전시회 불법 협찬 의혹에 대해

스스로 고발해 진실을 규명할 용기는 있는가?

뇌물수수 의혹으로 경찰수사를 받던

윤대진의 친형인 윤우진 전 용산 세무서장에게

직접 변호사를 소개해주고 무혐의 처분 과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공수처 수사를 받을 의지는 있는가?

국민들의 질문에 대답은 외면한채

민주화 성지를 더럽힌 윤석열.

천박한 눈물 쇼(?) 가면뒤엔

권력욕에 찌든 몰골이 숨어있다.

하나둘 그와 가족들의 허울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온 가족이 법의 심판대에 설 날이 멀지 않았다.

전두환은 군사쿠데타로 광주를 도륙했고

윤석열은 검찰쿠데타로 조국네를 도륙했다.

전두환이 역사의 죄인이 됐듯이

윤석열도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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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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