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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목회자와 풀타임 사역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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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목회자와 풀타임 사역자에 대하여
  • 딴지 USA
  • 승인 2021.06.08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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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목회자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능하면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치면 꼴불견이나 밉상이 됩니다. 일하는 목회자, 줄임말로 ‘일목’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도 어쩌면 일목에 속하겠지요. 풀타임 사역으로는 먹고살기 힘드니 뭐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내와 자식새끼가 굶고있는데 그래도 목회자는 일해서는 안된다는 자들이야 말로 한심하죠.

보수적인 교회 환경에서 자란 목회자들 중에는 여전히 이런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 분들에 비하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슨 노가다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는 목회자들이 존경스럽고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일부 일목 중에는 이러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풀타임 사역자들을 마치 죄인 보듯 이상적이지 않은 사역자상으로 인식한다는 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가 직접 일해서 생계를 꾸리기 때문에 목회도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정말 동전의 양면을 보지 못하는 편협 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비단 일부 일목들만의 생각은 아니더군요. 요즘은 많은 평신도들도 일목을 마치 이상적인 목회자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풀타임 사역자로 교회의 녹을 먹으며 살아가는 목회자보다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일목들이야 말로 이 시대에 필요하고 많아져야 한다는 목회자들이라고 말입니다. 어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어떻게 적잖은 성도들까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 지인들과 나눠보니 모아지는 의견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기성세대 목사님들이 하도 본을 보이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록 열악한 환경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큰 규모로 성장시키는 데까지 온갖 고생은 다 했지만 마치 그동안의 수고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그에 넘치는 보상도 다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권력, 명예, 부 모두를 한 손에 거머쥐고 누릴 것은 다 누렸기에 여한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아온 후배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내가 심어서 애지중지 키워서 얻은 열매를 오로지 내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고 내 소유로 전락시키는 것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정신은 아닐 겁니다. 사도바울도 고백했듯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3:6-7)는 말씀을 기성세대 목사님들은 잘 보여주지 못한 듯 합니다.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은 아니었을텐데 말입니다. 함께 해준 수많은 성도들의 노력과 헌신이 이루어진 열매일 것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어쩌면 본인은 지휘자로서 지휘봉을 가지고 지휘를 했을 뿐 실제로 연주하고 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의 소리를 자기를 위치에서 이웃 동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게 소리를 내준 단원들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지휘자만이 인정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세상 이치이니 목회자들도 스스로를 주님 앞에 겸손히 서지 않는다면 자신이 한 것이라고 나팔을 불며 다닐만도 하겠지요. 거기에 권력과 명예와 부까지 손에 넣었으니 어깨가 하늘만큼 들썩이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반사작용으로 일목들도, 또 일목을 마치 이상적인 목회자처럼 생각하는 많은 성도들이 생겨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요인 전부는 아닐 겁니다.

종종 이런 철없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뱉으면서 풀타임 사역자들을 마치 이상적인 목회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성도들을 보면 욱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이 직접 해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고 말입니다. 몸이 으서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한 일목이 설교 준비는 얼마나 지속적으로 잘할 수 있을까요. 성도들의 어려움에 그때그때 대처해야 하는 심방은 또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풀타임 사역자들도 일목 못지않게 치열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안되는 풀타임 사역자의 월급을 받으면서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목회하는 분들도 많다는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일목 중에 노가다 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안정적인 사례비를 주는 교회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청빙하면 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니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일하는 사역자들이 일목 아닙니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일하는 목회자이니 마치 풀타임 사역자들이 이상적인 목회자가 아니라는 시선은 정말 삐뚤어진 생각입니다. 물론 풀타임 사역자이면서 치열하게 목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손가락질 받을 만한 대상이 되겠지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국민들이 전체주의 국가를 보면서 쉽게 가질 수 있는 편견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무조건 선진적이고 1인 독재로 통치되는 전체주의는 무조건 위험하고 좋은 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교회 역사에서도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교회 권력이 집중되어 생기는 폐단을 막기 위해 생겨난 것이 일종의 회중정치를 지향하는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어느 쪽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다 집중된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요, 회중들이 직접 교회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목회자는 설교와 돌봄 외에 교회 재정과 운영에 일절 참여할 수 없게 하는 교회라고 해서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것도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운영위원회 위원장이나 재정위원회 위원장과 같은 직분을 가지고 마치 완장이라도 찼듯이 세력을 구성하여 교회 내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목사들을 좌지우지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회중교회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숙하지 못하면 그 어떤 이상적인 시스템을 도입하여 조직을 꾸린다고 해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숨을 죽이며 관람하고 기꺼이 기립하여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단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소리를 내되 한 팀으로 함께 어우러져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휘자인 담임목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맘에 안드는 사람 잘라내는데 함부로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각 지체가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게 하면서도 타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함께 어우러져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목회자만이 마치 이상적인 목회자 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풀타임 사역자가 일목보다 쉽다구요? 과거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사역으로 풀타임 사역자가 되었을때가 생각납니다. 사례비 120만원만 받았을 뿐이고 내가 하는 사역은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새벽 2시에 전화가 와도 교통도 없는 외곽 공장으로 두세 시간이나 운전하여 달려가야 했습니다. 24시간 언제든지 대기상태로 어려움이 있다고 호출이 오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하는 것이 풀타임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목회자가 마치 바른 목회자인 것처럼 말하는 평신도들이 과연 그 일목들에게 24시간 언제라도 목회적 돌봄을 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나요?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가다를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떻게든 몇명의 성도라도 더 말씀으로 돌보고 세우려고 하는 일목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가족들의 가난을 방치하고 사역이라는 명분으로 버티는 이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풀타임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도 일목 못지않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기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풀타임 목회자도, 일하는 목회자도,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성도들도 서로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의 멋진 하모니를 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교회를 세워나간다면 세상은 우리의 아름다운 연주에 숨죽이고 압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은 이런 고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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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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