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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의 접근 방법, 이대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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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의 접근 방법, 이대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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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18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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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들 ‘페미니즘’ 반발 이유 최근에야 이해했죠”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901335.html...

“시스템의 실패다.” 진단은 간명했다. 이른바 ‘20대 남성’으로 호명되는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페미니즘에 대해 격렬한 백래시(반발)를 보이는 것일까에 대한 답이다.

나윤경(54)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지난 3일 인터뷰에서 “남성성이 학교 교육 현장에서 (잘 길러지도록) 제도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해진 분량과 마감시한을 요구하는 ‘수행평가’를 예로 들며 “한국 사회가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평가기준 등이) 여성성에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남성적인 특징은 소외되기 쉽다고 봤다.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교육방식이나 평가기준이 다양하지 않으니 “남자아이들에게 여자아이는 ‘우수한 존재’일 뿐이고, 여성 차별은 억지 주장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최근에야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지난달 27일 열린 취임 1돌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다양성을 보장하거나 존중하는 대신 차별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가 된 것은 “시스템의 실패”이자 “기성세대의 실수”라고 했다. 그의 인식은 ‘양평원’ 누리집의 인사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사회는 실질적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 관계의 민주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앞두고 있”고, “국가와 민족 등 거대 서사가 지운 개인적 차원의 정의로움, 관계 안에서의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가 모두의 숙제”가 됐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양평원’의 변화도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를 개발하고 이를 위한 성교육 콘텐츠를 다양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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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도 학자인데, 특히 인문사회 분야 학자들이, 자신들이 속해있는 주류 학파 분위기에 휩쓸려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잘 못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이걸 한번 생각해보죠.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을 잘 한다는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 차별을 없애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짬뽕과 짜장면 사이에 “차별이 없는 것”일까요?

첫째, 나는 짬뽕을 좋아하든 짜장면을 좋아하든 업무상 능력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는 일과 관련된 업무능력만 보지, 그 사람이 짬뽕을 좋아하든 짜장면을 좋아하든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둘째,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짬뽕은 회사 업무에 더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지금까지 짜장면이 더 우대받았던 것은, 사회가 더 억압적이고 평가기준도 획일화되었기 때문이죠. 짬뽕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다면,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더 선호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사회에는 사실 짬뽕과 짜장면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짬뽕과 짜장면으로 예를 들면 사람들이 문제를 쉽게 파악합니다.

그러나 실제 차별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문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더군요.

짜장면이 우대받는 세상에서 짜장면과 짬뽕 사이의 차별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짬뽕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짬뽕과 짜장면의 선호도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 자체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설사 여성이 더 잘 나가는 세상이 되더라도, 그것이 여성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 없이 동일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가야 할 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윤경 “진흥원장”의 주장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여전히 인정하는 전제 하에, 여성성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사실 니들이 무식해서 그래. 남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나 원장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성이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결책이 연결됩니다. 위에 인용된 해당 부분을 다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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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를 맹신하고, 다양성을 보장하거나 존중하는 대신 차별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가 된 것은 “시스템의 실패”이자 “기성세대의 실수”라고 했다. 그의 인식은 ‘양평원’ 누리집의 인사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사회는 실질적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 관계의 민주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앞두고 있”고, “국가와 민족 등 거대 서사가 지운 개인적 차원의 정의로움, 관계 안에서의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가 모두의 숙제”가 됐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양평원’의 변화도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를 개발하고 이를 위한 성교육 콘텐츠를 다양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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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장은 실질적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 관계의 민주화가 우리 사회의 또다른 과제이고, 국가와 민족 등 거대 서사가 지운 개인적 차원의 정의로움, 관계 안에서의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가 모두의 숙제가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과제들, 숙제들의 해답으로 여성주의를 설득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 원장에게 있어, 민주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주의를 설득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에게 있어 여성성은 민주주의 등과 연결되는 반면, 맹목적 맹신주의와 차별은 남성성과 연결됩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을 날카롭게 인식하는 주디스 버틀러 같은 여성주의자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이론적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여성주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를 전제하고, 과거의 전근대적, 봉건적 문제점들을 남성성에, 진보적 가치들을 여성성에 연결시키는 프레임을 고수합니다. 이런 프레임이라면 당연히 여성주의가 진보 그 자체가 되죠.

그러나 이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제가 지금 예로 든 짬뽕과 짜장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우리나라 여성주의의 이러한 접근방법은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는 전근대적, 남성우월적 사고방식의 미러링 - 그들의 정말 좋아하는 단어죠 - 에 불과합니다.

미러링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효과적인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해결책은 도출할 수 없습니다. 개념상 미러링이 지적하는 문제점과 동일한 문제점을 내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저는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성공한 남성들이 우리나라의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바탕에는 “온정적 가부장주의”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여성주의의 발전 정도로는 자신의 지위에서 잃을 것이 없는, 성공한 남성들이 보여주는 온정적이고 여유로운 사고가 바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온정적 가부장주의는 1세대 여성주의 운동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오래된 전통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남편 만난 “신여성”들이 주장했던 주르주아적인 여성 해방은, 그들의 남편들이 서울대 나온 ”깨어 있는” 기득권들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른바 “서울대 남편 - 이화여대 부인“의 스테레오타입이 여기서 나왔죠. 저는 지금의 “성공한 자칭 진보 남성들”의 페미니즘 인식 구조가 근대화 당시의 이 스트레오타입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세대들의 남녀 대립을 “성공한 자칭 진보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밸런스를 조정하는 문제 자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인식하는 차별 구조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무작정 이들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차이점을 날카롭게 인식하는 것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의 여성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바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접근하는 한, 우리나라 여성주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반이 여성인 것처럼, 세상의 반은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가기

By Pilsung Kim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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