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인식론적 종결 욕구에 빠진 판검사, 한국 기독교, 고위 공직자들
상태바
인식론적 종결 욕구에 빠진 판검사, 한국 기독교, 고위 공직자들
  • 딴지 USA
  • 승인 2021.02.25 0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식론적 종결 욕구

1. 일종의 성격적 결함처럼 여겨지는 “인식론적 종결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 새로운 지식이나 정황에 처하면 기존의 자기 권위가 흔들려 매우 당황해 하며 속전 속결 자기 편리한대로 결론을 지으려는 성격을 가진 이의 속성)”라는 개념이 요즘 각별히 내게 다가온다. 우리사회 도처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가리키기에 적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편견을 정견처럼 여기는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성격 결함을 지칭하면서 알포트(Gorden W. Allport)는 권위주의적인 유형의 인간들이 유독 편견의 온상이 된다고 보았다. 왜 그럴까?

2. 기독교 신앙 집단의 병리적 현상을 지적한 이론이 무척 많지만, 그 중에서 알포트의 이론과 접합시켜 한 가지만 지적하라면 나는 “진리 독점 중독증”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자신들만 독점하고 있다는 의식은 “말세의 비밀”. “구원의 도리”, “CCC의 4영리“, ”워치만 리의 종교론“, 그 흔한 ”영혼 구원론“에 깊이 깔려 있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오직 기독교 집단 내부의 논리로서 외부와의 소통이 잘 안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확신 체계라는 말이다. 과연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진리, 참된 진리일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는데, 진리를 가진 자들이 자유는커녕 남의 자유를 마구 짓밟는 정신적 폭력배와 하등 다름이 없다. 왜 그럴까?

3. 문재인 정권 중요 권력자들이 전혀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다. 검찰총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숨죽이고 있다가 대통령이 임명한 그의 상관을 치받는 상습범처럼 보이고, 감사원장이라는 자는 국가의 부정부패를 감시해야 할 막중한 소명을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는 것 같이 보인다. 거기다가 검사출신 민정수석은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나가자빠지는 행태를 보인다. 왜 그럴까? 검찰총장, 감사원장, 민정수석 이들의 공통분모는 내가 아무리 봐도 인식론적 종결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향을 가진 자들이다. 새로운 시대에 중증 부적응증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4. “인식론적종결욕구“라는 말은 사회 심리학적인 전문 용어다.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 조류,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만나면 신속하게 정리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성격에서 보이는 욕구를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공부 잘하고, 우등생이며, 나태하거나 실수가 없고, 주변의 인정을 받아 명성과 명예 얻기를 좋아하고, 자신만만한 권위주의자들이다. 대부분 고등학교 시절 최상위 성적으로 최고의 좋은 대학에 가고, 거기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오른 이들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바로 인식론적 종결욕구다. 이들의 전형적 특징은 새로운 정황을 소화하지 못하는 데 그 근본 문제가 있다. 왜 그럴까?

5. 기독교는 거의 2000년 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진리가 과연 참된 진리인지 의심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동질 내적 집단(inner group) 안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보는 습성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 집단과 비슷하다. 오히려 이들은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을 의혹하거나 의심하며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결과 서둘러 종교 재판과 같은 엉터리 결론과 해결책을 택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질성이 없는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 이들이 믿고 이해하던 진리는 사실 “자기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서구 중심의 인간론, 문화론, 역사론, 우주론을 낳았고, 탈서구적인 세계는 그들의 진리관에서 너무나 멀고, 열등하거나, 모자라는 것으로 단정되었다. 서구 기독교가 편견 덩어리가 된 이유다. 왜 그럴까?

6. 자기 동질 집단 안에서 서로를 강화하던 논리는 정설과 이단이라는 논리였다. 정설은 과거에 형성된 것이고,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단적인 것은 정설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무수한 종교재판, 사형제도, 마녀사냥의 제의를 낳은 것이 바로 이런 시각이다. 자기 내부의 논리와 사고를 진리체계라고 굳게 믿고, 그 진리 체계를 의심하여 애매한 태도를 보이거나, 부정하여 거부하는 행위나, 심지어 그러한 진리 체계의 권위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향하여 진리독점중독자들은 관용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런 짓을 교도한 자들이 누구였을까? 그 시대에 가장 영특하고, 머리가 좋은 이들, 곧 성직자들이었다. 그 때, 오늘의 검판사들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최고의 권위주의자들이 바로 성직자였다. 이들이 옹호하던 진리가 참된 진리였을까?

7. 우리 사회에서 해방이후 형성된 민주화의 과정은 이승만 독재,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독재와 싸우면서 조금씩 속이 차올랐다. 우리 사회의 영특한 자들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이승만-박정희 체제를 굳히는 인자로 기능해 왔다. 이들은 수재였고, 남에게 지지 않았으며, 비정한 각오로 부모와 형제의 궁핍한 현실을 모른 척하면서 자기 영달을 꾀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성취하여 얻은 지위, 권력, 재산, 명예는 배타적인 것이었고, 성공한 그들만의 “특수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80년 동안 그 특수 집단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을 최대한 강화해온 장본인들이다. 이 특수 집단은 늘공 집단 속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은 특권을 보장받아 왔다. 부도덕한 정권은 그들을 필요로 했고, 그들은 부도덕한 정권의 요구에 익숙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진리의 종결자임을 주장하던 기독교는 어떠했을까?

8.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은 적어도 한국 교회에서는 허공에 떠 있다. 기독교가 주장한 진리는 시금석이 되어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바르게 하여 온갖 거짓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지평을 거부하는, 배타적 공격과 부정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기독교는 진리가 주는 자유의 정신을 살아내기보다는 진리를 빙자하여 치부하고, 성장하고, 독재정권 하에서 출세하고, 온갖 기득권을 나누는 축복의 논리로 변질시켰다. 정신이 물질에 의하여 압도된 현실이 바로 한국 기독교의 실상이다. 예수가 말했던 진리가 과연 그런 것이었나?

9. 독재정권 하에서 침묵하며 최상의 늘공 자리에 이른 이들이 자신들이 그간 살아온 방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목하 검찰 세계에서 윤석열을 필두로 우리 사회를 향하여 분노의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안 들리는가? 늘공 세계에서 문재인 정권과 엇박자내는 감사원장, 여성부 장관, 그리고 임명장 받자마자 쓰다고 내밷는 민정수석의 행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 독점 중독증에 걸린 이들의 진리 점유 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라는 소리다. 이를 다른 소리로 말하면 “새로운 것은 애매해서 싫고, 우리가 가진 것을 잃게 되니 싫다”라는 소리다. 나는 전광훈이의 기독교는 바로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이를 가리지 않고 과거 속에서 그들과 권력 근친성을 나누며 성공을 거두어온 기독교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10. 새로운 시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나는 문재인 정권의 어려움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슬픔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부정의(不正義)한 역사 속에서 생존해온 고위급 인사들 중에서 쓸만한 새 부대가 없기 때문에 번번이 부대가 터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더 익숙한 한국 기독교 역시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낼 능력이 박약해 보인다.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하고, 과거의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과거의 습관, 습성,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무원 세계보다 기독교는 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공무원의 세계에는 경전이 없지만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경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전의 야만과 왕조 세계의 이야기,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세계에서 기록된 내용을 진리 그 자체라고 읽는 시대착오성에 너무나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사회이론이란 그저 지엽적이고 지역적인 “좁은 세계”에서 유통하던 논리에 그치고, 사회윤리와 도덕적 책무란 시골의 편협한 관계를 이어나가기에 적합한 개인적이며 사사로운 의무와 책무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神學)이 나왔건만, 신학은 신학(新學)이라고 배타하고 옛 것으로 안일하게 되돌아가기를 좋아한다. 이것 또한 인식론적인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는 종결욕구 때문이다.

11. 그러나 19세기 이후 세계는 시공간적으로 급격히 밀착되었고, 보이지 않던 이웃 종교가 눈앞에 나타났을 뿐만이 아니라 성서적 권력, 정치 이해는 아예 근본에서 부정되고 있는 세속화된 세상이 되었다. 성서에 없었던 민주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지만 성서적 진리를 고수하려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인본주의라며 거부하고, 독재적 권위자에 맹종하는 것을 바보같이 덕스럽게 여기는 집단의 구성원을 자처한다. 좁혀진 세계에서 다수 인종, 이웃 종교의 등장은 기독교 진리의 실천적 증명을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속수무책 이웃과 어울려 살지도 못하고 실천적으로 무능하다. 보수적일수록 삶과 관련성이 없는 진리를 외치며 영혼구원으로 도망치기 일쑤다. 종교 다원주의, 보편적 인권 사상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여전히 유아적인 진리 담론의 종결자를 자처한다. 다원성과 관용의 정신이 결여된 기독교는 그러므로 현대 지성의 눈에는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다. 예수가 이런 종교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라고 나는 보기 어렵다.

12. 나는 대검찰청의 검사 무리를 바라보면서 저들이 가진 오만의 근거를 이해한다. 수재 소리를 듣고, 비뚤어진 권력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 그 공력을 개혁으로 날려버리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상징 조국 교수의 새 바람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그들에게는 그저 순리에 반하는 역성혁명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몰려다니며 조국 타도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검찰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열린 담론을 거부하는 무리, 인식론적 종결욕구를 버릴 수 없는 무리, 어쩌면 보수 기독교와 저리도 닮았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진리종결중독증이라는 만성질환에 걸려 있다면, 오늘의 판검사를 필두로 하는 고급 관료들은 인식론적 종결욕구에 집단으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다.

13. 우리는 진리 앞에 겸허히 서야 한다. 진리는 기독교인이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기독교에 의하여 종결되지 않는다. 아울러 검찰, 고위 공무원들, 그대들이 제아무리 우수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것을 향해서는 문을 열어두고 귀를 기울여야 옳은 것이 아닐까? 그대들의 헛된 몸짓이 변화의 흐름을 잠시 느리게 할 수는 있어도 변화의 새 바람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나 싶다. 파당적 이해관계에 빠져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며 허우적대다가 후대에게 부끄러운 후진 사회를 넘겨주던 조선조 선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행태는 이제 그쳐야 할 때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진리를 종결하려는 자는 비진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법, 새로운 질서를 인식하기를 두려워하여 사람의 입을 막고, 사람을 쫓아내거나 죽이고, 체제를 멈추게 하려 하는 짓이 얼마나 허무한 짓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는 열려 있어야 진리다. 닫힌 진리는 거짓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기독교나 판검사, 고위 공무원 집단은 인식론적 종결 욕구에 빠진 환자들이라고 보면 무리일까? 둘 다 유통기한이 지난 허약한 권위와 지위를 지키려 버둥대기만 할뿐 자신이 깊이 병든 줄도 모르고 있다.

 

 

 

함께 만드는 언론, 시민들의 확성기 [딴지 USA]

출처가기

By CK Park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 /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