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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시사] 믿을 수 없는 판결 내린 판사 여상규. 재심에서 무죄 받은 어부 김정인 간첩으로 사형에 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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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시사] 믿을 수 없는 판결 내린 판사 여상규. 재심에서 무죄 받은 어부 김정인 간첩으로 사형에 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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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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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재심에서 무죄 받은 어부 김정인, 그를 사형에 처한 현 국회 법사위원장

믿을 수 없는 판결 내린 판사 여상규

 

▲  1981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안전기획부 발표 고정간첩 3개강15명 검거"
 

 
지난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어부들은 간첩으로 만들기 좋은 '재료'였다. 어부들은 약삭빠른 도시인들에 비해 자기방어 능력이 약했고, 바다를 통해 표류 등으로 북한을 쉽게 넘나들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군사정권은 긴장이나 위기가 필요할 때 수시로 간첩 사건을 발표해서 국면 전환용으로 써먹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어부와 가족들은 '간첩'으로 만들어져 군사정권 연장을 위한 손쉬운 소모품이 되었다. 김정인, 한화자, 석달윤씨 등도 전두환 정권이 써먹은 그 소모품 중 하나였다.
 
1980년 전남 진도군의 한 작은 섬마을에서 어부 김정인은 처 한화자와 어장을 운영했고, 그의 외척 석달윤도 한 동네에서 어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 8월 무더운 한 여름날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비극의 날벼락이 덮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아래 중정) 요원들은 이 시골어촌에 '간첩' 박양민의 조카 김정인(41)과 그의 처 한화자(39), 동생 김정수(37), 모친 박두례(62), 외척 석달윤(46), 이모 박공심(41), 박양민의 동창 장제영(52) 등이 '진도가족간첩단'이라며 강제 연행해 갔다.
 
중정 요원들은 이 어부 가족들을 1980년 8월 21일부터 9월 30일까지 36일에서 50일 동안 불법 감금하며 매타작과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결국 김정인 등으로부터 '자백'을 받았고 총 7~8회에 걸쳐 중정 지하실에서 진술서와 조서를 받아냈다. 김정인은 나중에 서울지법 공판에서 "(중정과) 검찰에서 자백한 것은 또 고문이 있을까봐 허위 자백하였다"고 진술했다.
 
"내가 모든 것 뒤집어쓰고 갈 터이니 가족은 제발 살려 달라"
 
당시 김정인의 처 한화자는 "손목이 뒤로 묶인 채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당했고, 각목을 뒷무릎에 끼우고 꿇어 앉히게 하는 고문을 당했고, 구두로 구타 당하는 고문을 당했다", "샤워장 같은 곳에 저를 세워 두고 옆방에서 남편이 고문받으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게 하면서 협박했다", "하루는 나를 남편 김정인이 있는 옆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문틈으로 남편 얼굴이 보였다. 중정 직원이 샤워기를 틀어 내 얼굴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질식할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 이를 본 남편 김정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중정 직원에게 애원하기를 '내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갈 터이니 우리 가족은 제발 살려 달라, 내 처는 나한테 시집온 죄밖에 없다'고 하면서 애원을 했다. 나도 울고 남편도 울었다"라고 훗날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또 처 한화자가 중정에서 물고문을 받아 까무러칠 때 남편 김정인은 "마누라는 죄가 없으니 나만 죽이시오"라고 울부짖었다. "당신과 자식들만 살 수 있으면 나는 100번이라도 누명 쓸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김정인·한화자 부부는 5남매를 키우고 있었고 큰아들이 17살, 막내딸이 3살이었다.
 
한화자는 또 진실위에서 "남편은 가족을 사랑하는 우직한 남편이었다. 남편 김정인은 간첩 활동을 한 것이 전혀 없고 오로지 고기를 많이 잡아 처자식 먹여 살리는데 급급한 착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우리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더 이상 진도에서 살지 못하고 목포에서 숨어 살았다. 나도 중정에 끌려가 약 2개월간 불법감금 상태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라고 진술했다.

한화자는 '간첩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에 시어머니와 5남매를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났다. 그는 목포에서 식모살이, 공장 야간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남편의 누명을 벗기려면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다"고 훗날 법정에서 진술했다.
 
"중정에서 모진 고문...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허위자백"
 
김정인의 외척 석달윤은 1980년 8월 중정으로 "연행된 첫날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손과 발을 묶은 뒤 몽둥이를 끼워 책상 사이에 매달리게 한 뒤 물고문을 하였다. 혐의사실을 부인하자 200~300와트 밝기의 전구를 눈앞에 켜놓고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하였다.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니 정신이 빙빙 돌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추궁을 하면서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게 하였다. 25일부터는 담뱃불로 무릎 아래에서 발목 위까지 지져대기, 송곳으로 허벅지 찌르기 등 고문을 했다. 그러다 수사관들이 전선을 연결시키는 모습을 보고 전기고문을 당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 모든 것을 시인하겠다고 하였다. 그다음 날부터 자필진술서를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벌씩 써내고 한 자라도 틀리면 사정없이 몽둥이세례를 받았다"고 훗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석달윤은 서울지법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중정에서 47일간 조사를 받는 동안 고문 등이 심해 거짓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0년 10월 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까지 불법 구금 상태에서 잠 안재우기, 성기에 볼펜심 쑤셔 넣기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외에도 석달윤은 "중정 조사관 6명(2인 3조)에게 47일간 조사받으면서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위자백하였고, 검찰조사 시 중정 진술과 다른 진술을 할 경우 검찰청 15층에 올라가 더 무서운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또 당시 "검사에게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혐의 사실을 부인했으나 꾸중만 들었다"고 주장했다.
 
서울고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석달윤은 "(남파간첩이라는) 박양민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중정에서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이고, 검찰에서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하였다고 주장했으나 검사가 일축해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 석달윤은 "중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결국 전기고문까지 하려고 하여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박양민을 한 차례 만났다고 허위자백했는데 이후 8차례나 만난 것으로 되어버렸다"고 진술했다.
 
상고이유서에서도 석달윤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주장을 반복하면서, "중정 151호실에서 2주일, 138호실에서 3주일, 153호실에서 2주일 동안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고, 다른 피고인보다 10일 늦게 연행되어 47일 동안 조사받았다"고 진술했다.
 
김정인의 동생 김정수는 "1980년 8월 중순경 김정인과 함께 연행되어 5~6일 동안 중정 수사관 김○○, 한○○, 김○○ 등에게 잠 안 재우기, 구타 등의 고문을 당하여 형님인 김정인이 이북에 갔다 왔다고 허위 진술했다"고 훗날 진실위에서 주장했다.
 
박영민의 동창 장제영은 1980년 12월 15일 서울지방법원 2차공판에서 1980년 8월 당시 "중정에서 56일 동안 조사를 받고 전에 앓던 정신분열증이 도질까 두려워 허위자백을 했다"고 진술했다. 또 1981년 5월 6일 서울고등법원 1차 공판에서 장제영은 당시 "중정에서 56일간 조사 받은 후 석달윤 등의 증인이 될 것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가 검찰에서 이를 부인하자 재구속 되었다"고 진술했다.
 
위와 같은 고문 끝에 1980년 9월 30일 중정은 김정인, 석달윤, 김정인의 이모 박공심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980년 10월 6일 서울구치소에 이들을 수감했다. 그리도 다음날인 1980년 10월 7일 서울지검에 김정인, 석달윤, 박공심, 장제영, 김정인의 모친 박두례, 동생 김정수, 처 한화자에 대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다.
 
서울지검은 중정의 의견서를 바탕으로 김정인과 석달윤 등에 대해 1980년 10월 8일부터 17일까지 총 4~5회에 걸쳐 조서를 작성했다.

"못난 소인을 한번 살려주세요"
 
당시 전주교도소 교도관 구○○은 "1981년 당시 전주교도소 보안과에서 수감자들의 상담과 계호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는데, 석달윤을 불러 상담을 해보면 의자에 바로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어 제가 석달윤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중정에서 수사를 받으면서 고문을 당하여 허리를 잘 쓰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석달윤을 부축하여 약 10여 회 이상 허리치료를 위해 교도소 내 의무과에 데리고 간 적이 있고, 다른 직원도 수십 차례 석달윤을 부축하여 교도소 내 의무과로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분위기상 신분장에 상담사실을 기재할 수 없었다"고 훗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전주교도소 교도관 박○는 "석달윤은 전주교도소 입소 당시부터 허리를 잘 쓰지 못하여 내가 석달윤을 부축하여 교도소 내 의무과로 약 10여 차례 이상 데리고 간 적이 있다. 당시 석달윤에게 왜 허리가 아프냐고 물어보면 중정에서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역시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이렇게 고문에 의한 '간첩 자백'이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상황이었음에도 1981년 1월 30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 결과 판사는 김정인에게 사형, 석달윤에게 무기징역, 박공심에게 징역 1년 6월과 자격정지 1년 6월, 장제영에게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이런 믿을 수 없는 판결을 내린 판사는 바로 여상규다. 여상규는 지금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자 국회 법사위 위원장으로 제2기 진실위 활동 재개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한편, 김정인 등은 위 1심판결에 대해 불복, 항소했다. 그러나 1981년 6월 4일 서울고법은 이들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김정인의 이모 박공심은 상소를 포기해 2심판결이 확정되었고 김정인, 석달윤, 장제영 등은 불복해 상고했다. 그러나 1982년 5월 25일 대법원은 이들의 상고를 기각해 그 판결이 확정되었다.
 
김정인의 (맞춤법이 틀린) 2차 재심청구서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을 가지고 채고형까지는 너무나 가하지 않읍니까. 넓으신 마음으로 이 못난 소인을 한번 살려주세요. 판사님 형법에 의한 벌만 주싶시요. 판사님…. 1984년 11월 15일 피고인 김정인" 


조작간첩사건으로 포상받고 진급한 중정수사관  

1985년 10월 31일,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는', '10월의 마지막 날', 47세 5남매의 가장이자 한화자의 남편 어부 김정인은 간첩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사형집행 당하기 전 자신의 두 눈을 기증한 김정인의 시신은 붉은 피로 뒤덮인 채 주검이 되어 한화자의 눈앞에 누워 있었다.

한화자는 당시 싸늘한 주검이 된 남편 김정인에게 "새 옷을 장만할 돈이 없어 시신을 그대로 묻었다"며 훗날 재심 법정에서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했다. 다정한 남편 김정인이 품고 있던 가족사진에는 '하느님,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도록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 글이 적혀 있었다. 김정인의 기도 글 덕분이었는지 한화자는 남편 사후 식모살이, 공장야근 등 각종 막일을 하며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한편 석달윤 및 장제영에 대하여는 상고를 기각해 그 판결이 확정되었다. 여상규 판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석달윤은 1998년 8월 15일, 17년 반의 감옥살이 끝에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박공심 및 장제영은 각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김정인, 한화자, 석달윤 등을 중정 지하실에서 무지막지하게 고문 수사한 일부 중정 수사관들은 이들이 사형 당하고 몇십 년 감옥살이하는 동안에 오히려 국가유공자로 포상을 받았고 진급했다.
 
그리고 약 8년이 흐른 2006년 1월 20일, 위 사건에 대해 한화자, 석달윤, 박공심, 장제영 등은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2007년 6월 26일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결정'을 하며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열린 재심에서 한화자, 석달윤 등은 사건 발생 2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서 2010년 10월 16일 억울하게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고인이 된 김정인은 부인 한화자가 신청한 재심에서 30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A4 용지 2장 분량의 '판결을 맺는 말'을 덧붙였다.
 

"법원이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무고한 생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닌가 회한을 떨칠 수 없습니다. 본 재판부 법관들은 과거 잘못된 역사가 남긴 가슴 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며, 이 사건과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겠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의 넋이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의 '과거사'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 아닌 현재의 문제
 

▲  여상규 국회 법사위원회 위원장이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안건을 의결하고 있다.
 

  
1980년 당시 죄 없는 어부 김정인에게 사형판결, 석달윤에게 무기징역 선고 등을 한 여상규는 지금껏 피해자들에게 사죄나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 2018년 1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여상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SBS 제작진이 "1심 판결로 한 분의 삶이 망가졌다, 책임은 느끼지 못하나?"라고 전화로 묻자 뜻밖에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답한다.

"웃기고 앉아 있네, 이 양반 정말."

그리고 여상규는 전화를 확 끊었다.
 
방송이 나간 후 여상규와 한때 같은 당에 몸담았던 바른정당의 권성주 대변인조차 "1980년대 불법 구금과 고문 속에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냈던 당시 판사(여상규)가 그 책임을 묻는 기자에게 '웃기고 앉아 있네'라며 대화를 끊던 모습은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억울하게 인생을 망친 피해자에게 사과와 위로의 한마디를 할 수 없는 것인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제1야당"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김정인 등 피해자들은 1980년 여상규가 판사로 있던 법정에서 장기간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이며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증인들도 중정에서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여상규는 이러한 고문 피해자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중정에서의 '자백'을 근거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반해 피해자 김정인에게 사형, 석달윤에게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한 위법을 저질렀다. 그리고 아직도 피해자들에게 미안해 하기는커녕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막중한 국회 법사위 위원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는 '미래를 보고 살아야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과거사'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데 있다.

지금 2기 진실위 활동 재개를 위한 '과거사법'이 국회 법사위에서 발목 잡혀 있고, 법사위 위원장은 바로 자유한국당의 여상규씨다. 여상규는 또한 지금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에서 '반헌법행위 집중검토대상자'로 지목되어 있는 인사다. 과거 인권침해사건의 가해자들이 많은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과거사법'이 불편한 것인가?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께 감사드린다.

 

게시판 참여 클릭: [주장] 재심에서 무죄 받은 어부 김정인, 그를 사형에 처한 현 국회 법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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