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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맹목적 성경 읽기와 한절이라도 이해하며 읽어가기
 회원_475315
 2020-07-29 15:07:38  |   조회: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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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다독은 가장 강력한 신앙의 무기로 말해진다.

성경 몇독 했다하면 거기서부터 뭔가 권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일주일 동안 거행되는 성경 통독 세미나가 판을 친다.

일주일동안 정말 쉴 새 없이 성경을 읽고 1독을 완성하는 것이다.

교회는 연말이 되면 통독을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교회가 많다.

전도왕부터 성경통독왕까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나도 예전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때 통독을 인도하는 시간을 이끌어 본 적이 있다.

새벽이라 목도 안좋고 심지어 속독으로 성경을 읽다 목이 메여 소리가 안나오는 상황까지 왔었는데 물 한모금이 없어서 그날 어떻게 성경을 읽었는지 잘 기억도 안난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다독하면 성경 몇독이라는 금자탑을 세워서 신앙적 권위를 획득했다고 여긴다.

천국 갈 때 상장을 많이 들고 가는 면류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전도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맹목적으로 읽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될까?

나도 하루에 이사야를 다 읽어본 적이 있고 욥기는 대학 1-2학년때 40번정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읽고 싶어서 읽긴 했지만 뭔지는 잘 몰랐다.

특별히 레위기나 족보를 읽을 때는 이것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거룩한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에 이해가 안되면서도 억지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5번 쯔음 읽었을 때 대충 스토리가 이해가 가긴 했다.

10번쯤 읽었을 때 뭔가 자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20번쯤 읽고는 관뒀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고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성경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야 한번쯤은 읽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해도 못하고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나도 나름 정독이라고 읽었지만 그 정독이라는 것도 1절 읽고 2절 읽으면 이해가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만 오해하고 오독하며 읽었던 것은 얼마나 많았을지 모른다.

내가 대학 3학년때부터 했던 일이 있다.

성경 한권이라도 알고 넘어가자는 거였다.

제일 먼저 집어든 책이 아모스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얇아서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아모스를 좋아한다.

성경 66권을 언제 알겠냐만은 아모스서, 오바댜서, 나훔서 같은 책들을 섭렵해가면 언젠가는 66권을 달성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유명했던 몇권의 아모스서 주석이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읽고, 그다음엔 또 다른 소예언서를 읽고 그렇게 12권의 소예언서를 다 읽어봤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소예언서는 대학원 수업시간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사용할 때 밖에 사용하지 않는 책이 될 뿐이었다.

나름 유명한 박사님들의 책이었는데 모조리 틀린 해석들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좋은 주석은 거의 없었고, 주석이라고 있는 책들은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 책들이었다.

결국 본문을 공부하려면 때로는 번역을 해야 했고, 구하기 어려운 학자들의 글을 찾아내야 했다.

창세기나 마태복음의 주석들은 많았지만 그 외의 주석들은 책당 적게는 2-3권, 많게는 아모스 같은 경우 10권도 있었던 것 같은데 크게 좋았던 주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한글로 번역된 좋은 주석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은 주석보다도 신학적인 책들을 읽는 경우가 더 많긴 하다.

하지만 언제나 본문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주석을 가까이 하며 읽어왔고 읽어간다.

그럼에도 늘 책이란 건 늘 아쉬운 점이 많다.

1권의 책으로 완벽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학자들의 새로운 관점이나 새로운 시선들의 눈으로 볼 때 그런 시선들이 주는 관점은 매우 신선하고 탁월하다. 그런데 막상 주석들은 그런 관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석이 최근의 주석이 아니거나 그러한 시선을 가진 학자들이 그런 주석을 내지 못했거나 그런 책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좋은 책인데 번역 안된 책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그래도 그런 책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성경은 다독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독도 꼭 답은 아니다.

물론 성경은 여러 번역이 있어서 이제는 참조할 성경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정독만으로도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학을 배우고 신학대학, 그리고 더 높은 코스까지 공부하는 것이다.

역시 선생님이 필요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열심’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도 몰랐다.

신약에 관심이 적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구약 못지않게 신약 책을 많이 봤는데도 열심이라는 단어는 공부 열심히 할 때의 열심 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었다.

교수님으로부터 열심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나서부터 다시 그 책들을 보니 그제서야 그 책들이 열심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었던 건지를 그제서야 알았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정말 필요하다.

실제로 좋은 선생님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물론 좋은 선생님을 자주 만나면 좋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많지는 않다.

그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책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선생님을 만나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더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요즘 내 주변에는 정말 본문과 열심인 형제님들이 몇 분 계신다.

매일 본문과 싸운다.

물론 그 본문에 대한 해석이 내가 생각하는 해석과 다를 때도 많다.

그러나 사실 나 조차도 한 본문에 대해서도 생각이 수없이 바뀐다.

때로는 나와 다른 해석이 못마땅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그분이 본문과 씨름한 결과다.

그리고 그 분도 계속해서 본문과 씨름할 것이고 또 그 분도 본문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가져올 것이다.

또 나랑 다르면 다르기 때문에 더 흥미로울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국 이해하며 읽어야 할 책이지 무슨 자랑거리나 신앙인의 특권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명함을 내미는데 그 명함에는 40일 금식기도 2번한 목사라는 명함이 파여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은근한 영적인 권위를 자랑한 것이다.

성경을 100독 하든 200독하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100독을 하든 1000독을 하든 머리에 똥만 차서 그것이 옳다고 투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경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성경 앞에 겸손하게 그 말씀이 하고자 하는 말씀을 하나하나 곱씹어 가며 나가야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2000권을 읽든 3000권을 읽든 그게 자랑이 되면 안된다.

사실 머리가 나빠서 책은 읽고 바로 잊어버린다.

그땐 다 안다 싶었는데 지나고 나면 머리에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냥 우리는 성경 앞에 겸손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냥 그 본문 읽고 그 본문이 말하는 바를 고민하고 고뇌하고 그리고 거기서 얻은 통찰을 내 가슴에 체화시켜 살아가는 것, 결국 그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성경은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때로는 토론하고 때로는 질문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세상에서 그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몇 독 읽은 것 그만 자랑하자!

의미도 모른 채 그냥 무조건 많이 읽는 것 그것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조금 늦더라도 시간이 걸려도 본문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한 본문을 이해하면 조금씩 성경의 많은 문들이 열리고 보여지게 된다.

내 주변에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음에도 매일같이 신학서적과 주석들을 연구하며 씨름하는 형제님들이 꽤 있다.

이런 분들이 많아져서 말씀에 대해 깊이 있는 묵상과 고뇌와 토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렘브란트의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는 그림처럼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가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각자가 가진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모습처럼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려는 태도가 우리 사회에 많아졌으면 한다.

 

출처: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2743166315902437&id=100006272858448

 

2020-07-29 15: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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