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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좋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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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6 12:02:52  |   조회: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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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강남에 있는 새길 교회 27주년 예배에 참석했다. 오래 된 멤버들이 연세가 깊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설교를 맡은 한완상 박사의 설교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신학적 구조를 가슴 아프게 드러내는 말씀이었다. 기독교는 사실 예수의 삶과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여과해 낸 가르침이 사실 전부다. 그런데 교회에서 언제부터인가 정작 참된 예수가 생략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좋은 교회를 이루어가기 참 힘든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거스틴 시대를 전후하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예수를 잘 포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기호에 맞추어 보다 대중성 있고 많은 이들에게 호감이 가도록 만든 셈이다. 제국의 뷰유한 지배자들이 받아들일만한 예수로 재해석했다. 교리화된 예수, 부담 없는 예수, 복의 근원이 되는 예수, 치유자 예수, 영혼 구원자 예수, 승리의 그리스도, 왕중의 왕 -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예수가 불리어 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포장된 예수가 진짜 예수를 가려 버린 것이다.

예수는 평화를 가르쳤고, 원수사랑을 가르쳤고, 자기 겸비를 가르쳤고, 십자가의 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전쟁으로 얼룩졌다. 현대 교회도, 한국교회도 원수 맺기를 가르친다. 북한을 증오하는 논리, 좌파를 혐오하는 논리, 성적 성향이 다른 이를 비하하는 논리, 사랑보다는 증오를 가르친다. 그래서 경건한 자일수록 평화보다는 전쟁을 지지한다. 자기 겸비는커녕 오만과 자긍심만 키워준다. 십자가의 도를 적당히 번영과 축복의 도로 바꿨다. 여기에서 그려지는 예수는 사람의 기호에 맞추어 변형된 예수다.

이런 작업을 한 신학자들은 권력의 보호를 받았고 평안을 누렸다. 권력, 금력에 부역한 신학자들은 사실 어느 시대나 차고 넘쳤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 세상에 맞추어 적절하게 재해석한 것이다. 그 결과 “참된, 살아 있던 예수”를 외면하고, 철학적 윤리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효용가치가 있는” 예수를 창작해 냈다. 예수가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에게 필요한 예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토스토엡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비유는 이런 정황을 지시한다.

교회와 교권에 종속된 신학이 된 것이다. 그 신학은 정작 예수를 추방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가 신학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한 목회자들도 있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일 경우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교회는 여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타협주의자 어거스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타락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가 교권과 교리를 말하는 것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교권과 교리가 타락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신학은 차라리 악에 가깝다.

양심적 목회자들은 그래서 오늘도 고민한다. 효용성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참된 예수를 선포할 것인가의 문제다. 교회라는 제도는 하나의 기관이 되어 물질적 조건과 같은 현실적인 요구를 가진다. 본질적 가치는 인식의 차원에서 깊은 자각에 이르게 하지만 돈을 만들어 주는 그런 효용가치는 적다. 그러나 인식보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가슴을 자극하며 물질을 내놓게 하는 논리를 요구하는 효용성의 신학은 교회를 부유하게도 하고, 유능하게도 한다. 그 대신 십자가라든지, 자기희생이라든지 진실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정밀한 사고와 공존하기를 거부한다.

정밀한 사고란 유교적 학습법을 빌어 말한다면 격물치지(格物致知)다.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떠나 진리를 탐구하는 맑은 눈을 가져야만 격물치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퇴계는 경(敬)을 율곡은 성(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차원은 효용성에 눈먼 이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가 된다. 어렵기 때문이다. 어려우면 대중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더구나 선동적 설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간혹 사실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적당한 예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실인양 인용하는 수단 좋은 목회자들도 많이 있다. 은혜만 끼치면 되니까. 심지어 예화를 거짓으로 지어내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

효용론의 차원에서 현대인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어야 하나? 그것은 현대인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대답해 주는 것이다. 현대인들을 불러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고 구도의 길을 걷게 하는 목회는 정말 좁은 길이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 스스로도 가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밀한 사고와 답변은 그래서 할 수 없다. 현실에 대한 정밀한 사고는 무한한 부담감을 준다. 불의와 거짓, 진실과 위선, 유혹과 정직, 탐욕과 청빈,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차이, 역사의식, 예언자 정신 등등, 그리고 담임목사와 부목사, 전도사의 차별구조, 남녀평등의 불균형 등 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구별하고 명료하게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런 선명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원만함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참된 신학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정밀한 사고를 요구한다. 아니 정직한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진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라는 예수의 요구와 같은 의미다. 그러나 사람이 욕심, 정치적 야심이 개입하면 목회자들도 정밀한 사고의 길을 가기 어렵다. 처세술을 일러주는 속담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처세와 성공이 중요해지면 사람들은 정직하기 보다는 원만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원만하지 않은 이들을 곁에 두지 않는다. 부정직한 지도자는 정직한 이의 시선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목회자와 같이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인 교회를 위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는 무엇을 설교하려 할까? 권력을 비판하면 권력자들이 떠나고, 정의를 외치면 불의한 자들이 불편해하고, 가난을 칭찬하면 부자들이 불편해 하고, 좌를 보면 우가, 우를 보면 좌가 불편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설교하면 부딪치는 것이 없다. 모두 좋아한다. 은혜 아래 모든 것이 해소될 수 있다. 그러니 정밀하게 현실을 보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자락에 현실 속에서 무수한 생명을 괴롭히고 있는 악까지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 것이 문제다.

이런 교회에서 잘 적응하며 생활을 하려면 몇 가지 요건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교회 다니기 퍽 힘들어진다. 첫째, 원만하게, 적당히, 침묵하면서, 모른 체하고, 인내의 덕을 지킨다; 둘째, 정의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평등이란 무엇인지, 생명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셋째,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은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의 영이 지배하는 것이니 긍정적 사고를 해야 한다. 넷째, 정직하지 않고 불의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라면 이런 교회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의 신자들은 자유가 없어도 침묵하고, 정의를 요구하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배운 것이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 구조가 거의 전부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악을 비판하지 말라는 “사이비 복음“에 오염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독재도 비판하지 않고, 군사 구데타도 비판하지 않고, 온갖 폭력적 정권도 비판하지 않고, 대기업의 횡포도 비판하지 않고, 불의한 법원의 판단에도 침묵한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있어도 모른 체한다. 정밀하게 정직하게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회자의 비리가 있어도, 부정행위가 있어도, 교회 돈을 횡령해도 은혜롭게 보아야 한다. 정의의 눈으로 정밀한 사고를 하게 되면 그것은 모난 행위, 원만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추어진 죄와 악이 너무 많다. 교회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곳이라는 말만 되 뇌인다.

이렇게 정밀하거나 정직한 사고를 하지 않는 편안함이 지배하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아진 돈, 권력을 부정직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정직, 진실, 자유, 정의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하면 목회자나 신도들 자신의 삶에서도 그런 질문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악은 우리 내부에 이렇게 교묘하게 기생한다. 이렇듯 악의 숙주가 된 교회는 탐욕을 탐욕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부패한 권력을 부패한 권력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거짓을 거짓이라 말하지 못하는 교회, 예언자의 정신을 잃고 악에 대하여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이다. 그 대신 사이비 복음이 보장성 보험같이 자리를 잡는다. 예수의 삶과 사상을 생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매진한다.

이렇게 사이비 복음에 오염된 오늘의 신자들은 교리에 앞서는 것이 예수의 삶이요 사상인데 자꾸 그걸 생략한다. 예수다운 삶, 예수다운 사상이 없는 교회는 무엇을 하나? 그것 대신 하는 것이 있다. 종교 사업을 하는 것이다. 이웃교회가 문을 닫든지 상관없이 사방팔방에서 교인을 긁어모으고 자기 확장과 자기 치장에서 만족을 얻는다. 섬기는 교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지배하는 교회,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 긁어모으는 교회, 종의 공동체가 아니라 제도와 율법주의를 앞세워 지배하는 주인의 교회, 하나님 나라까지 열려있는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닫힌 교회, 끝없이 쌓아올리는 교회를 위하여 온갖 경주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는 하나님의 교회를 빙자하여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주인 노릇을 한다. 예수가 생략된 교회는 화려한 업적과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렇듯 타락한 교회다. 그대가 교회를 섬기고 있다면 타락한 교회를 만들어가서는 안 된다. 교회의 타락은 목회자의 타락에 후위한다. 그러므로 끝까지 낮아져서 섬기는 종이 되려 힘써야 한다. 70년 분단의 수치스러운 역사 앞에서 증오와 경쟁을 가르치지 말고 사랑을 설교해야한다.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며 은근히 신자들을 긁어모으기를 재촉하는 평신도들을 바꾸어 긁어모으지 않고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디 예수의 삶과 사상을 생략하고 외면하는 그런 교회, 교인이 되는 훈련은 하지 말아야 한다.

(2014년 3월 3일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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