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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지금 우리는 오폭의 시대를 살고 있다
 회원_975278
 2022-06-17 10:58:43  |   조회: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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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죽음은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다. 하지만 인간을 성찰하게 하기도 하고 성숙시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쟁영화를 좋아한다. 특정 인물을 미화하는 영웅담이나 특정 국가,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기 위해 조잡하게 제작한 국뽕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와 인간에 질문을 던지고 아픔을 통해 세계를 성찰하는 전쟁영화를 말하는 거다.

2차 대전 때 덴마크에서 연합군에 의한 오폭(誤爆)으로 86명의 어린이와 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게슈타포 본부인 셀후스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합군 비행 편대가 목표물을 잘못 인식하여 어린이가 다니는 수녀원학교를 폭격한 것이다. 전쟁은 적군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모든 동류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삼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실제 사건을 덴마크의 올레 보르네달 감독은 영화로 제작했는데, 넷플릭스에서 <폭격>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영화의 오프닝 신은 휘파람을 불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착하고 순진한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은 아름다운 세 자매가 결혼식 피로연에 가기 위해 예쁜 옷을 갈아입으며 기쁨에 들뜬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이 탄 택시는 독일군 차량으로 오인돼 연합군 비행기에 의해 폭격을 당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소년은 택시 안에서 피범벅이 되어 죽은 세 자매와 기사의 시신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실어증에 빠진다. 자전거는 넘어지고 싣고 가던 계란은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모두 깨지고 만다. 오프닝의 이 세 장면은 실화가 아니라 실화의 비극적 상황을 해석하는 감독의 문학적 장치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오프닝에서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데 보르네달 감독은 탁월한 오프닝을 선물한다.

사건은 단순했다. 아군에 의한 오폭 사건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 사건을 단순한 오폭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오류와 존재의 비극이라는 차원으로 해석한다. 그렇다, 문학과 예술은 세계와 사건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이며 결과다. 어떤 사건의 현상이나 기록마저도 그것이 사람의 인식 구조에 투영되는 순간 해석될 수밖에 없다. 역사도 실제가 아니라 해석의 결과일 뿐이다. 누가 무엇에 의해 그 역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건의 진실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다.

보르네달 감독이 해석한 코펜하겐의 오폭 사건은 깨진 계란처럼 부화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 그것도 근대의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인식의 오류가 세계에 어떤 비극을 연출하는지를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장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미 2천4백여 년 전에 민주주의의 모순에 대해 아프게 경험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무고하게 사형당하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가 대중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 우매한 대중이 민주주의 방식인 투표를 통해 어떻게 진실을 압제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와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통찰할 줄 아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격기 조종사들의 목표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86명의 죄 없는 생명이 죽은 일은 역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인 폭격은 전쟁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비극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1인 1투표제를 주는 것이 민주적인 원리이고 최고의 가치라는 걸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 평등하게 부여받은 권리로 인간은 히틀러를 지지하거나 선거에서 트럼프를 찍기도 하고 윤석열을 찍기도 한다. 선택의 자유에 따라 담임목사가 공금을 유용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세습을 해도 여전히 그 교회에 열광적으로 출석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지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고 현재의 상황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자신들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유럽은 어떠한가. 중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과 학살이 있던 시대였다. 혐오와 배제가 극심했던 시대다. 자기와 다른 이들을 이단으로 처단하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마녀의 혐의를 씌워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의 일이다.

진리를 아는 자들이 왜 그런가? 자기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인간은 천사와 막마 사이의 어디에서 방황하다가 어떤 동기만 주어지면 악마로 편입될 수 있는 존재다. 자기만의 인식 체계 안에 갇힐 때 인간은 악마가 되고 가장 야만스러워진다.

인간을 가장 편견에 빠트리기 쉬운 것이 종교적 신념이다. 자기의 인식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을 수 없게 하는 게 종교다. 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은 오늘도 엉뚱한 곳에 폭격을 감행한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히 밝힌 이재명을 폭격하고 신천지와 결탁하고 무속에 빠진 윤석열은 지지한다. 심지어는 그를 요셉에 비유하며 열열히 찬양한다.

우리는 지금 지독하고 끔찍한 오폭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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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10: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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