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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우리가 교회가 되자
 회원_445041
 2022-05-10 11:16:00  |   조회: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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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아닐지라도. 미국과 한국 전반에 교회가 약해지는건, 안타까운 일이다. 새 신자의 정체를 염려하는게 아니다. 기존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우리 아이들이다.

코비드 전에도 이미 "가나안" 성도는 급증하고 있었으나, 코비드 기간 동안의 교회 나가지 않았던 경험, 보수 교회들의 정치와의 연결에서 온 실망 (어쩌면, 미국과 한국이 그렇게 쌍동이처럼 따라하는지?), 그동안 쌓였던 교회들의 스캔달이 쌓여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또 떠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게 염려할 거리인가? 왜? 한국 사회에 기독교 교세가 줄어서 염려하는건 아니다. 우리가 꼭 다수가 아니어도 된다. 교회들이 문 닫으면 목사들 일거리 잃을까봐? 천만에 그건 알바 뛰고 일하면 된다. 바울처럼 노동하게 되면 하면되고, 그래서 얻을 것도 많다.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하는 믿음은 그들의 생명과 관련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인생은 살아있는듯 하나, 죽은 생명이다. 생명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며 그 분의 사랑에 응답함이 피조물이 마땅히 살아갈 바이다. 그 하나님이 없을 때 사람들은 거짓 신들을 섬기며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면, 결국 그 믿음을 잃게 된다. 정말? 그렇다. 어떤 모양으로든 함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들과의 펠로우십이 없다면 결국 신앙 자체를 잃게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교란에 "기독교" 라고 적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생명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 신앙의 신비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교회에 임하신다.

"좋은 교회가 없다?" 그렇지 않다. 아주 어두웠던 시기에도 주의 성령께서는 교회를 지키시고, 만드시고, 새롭게 하셨다. 그 어두운 중간기를 뚫고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나사렛당을 만들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제도화된 교회 가운데 수도원 운동이 자라났고, 로마 교회의 어두움 가운데 개혁신앙이 탄생했다.

"교회가 변혁되어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 현재의 교회와 성직자들은 비판받아야 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도적이고 주류된 교회들이 바르게 변화된 일은 드믈다. 또, 그 얘기 만 하다가 우리가 할 일을 생각지 못하는 비판과 패배주의에만 머물기엔.... 시간이 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는게 아니다. 교회를 떠나며 신앙을 잃어가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걸 해보자. 우리가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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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교회가 되자.

공동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공허하다.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건, 관계이다. 그건 눈에 보이고 잡힌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나자. 뭐할까? 얘기를 듣고 격려하고 기도해주자. 그들이 느꼈던 교회의 위선. 무관심. 무거운 짐. 답답함. 어리석음. 한계. 그리고 잃어가는 신앙. 그 모든 얘기를 듣는 친구가 되자.

당연한 것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많은 크리스챤들이 하지 않는다. "교회 가야지." "QT 해야지." "기도해줄께" 이런 말을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왜? 바빠서. 뭘로? 다른 중요한 일로. 아... 그러나, 내 사랑하는 이들이 신앙을 잃는건 중요하지 않은가?

만나려면, 의도성이 필요하다. 우선순위의 조정도 요구된다. 수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두명은 그렇게 하자. 교회는 싫어도, 모든 이들이 친구는 원한다. 그럼 친구가 되자.

2. 복음을 증거한다.

아니, 이미 신앙을 가졌던 이들인데? 당연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 2). 이 말씀은 노방전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목양하는 이가 성도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

어떤 복음을 전할 것인가?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사랑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공의, 세상에 대한 새로운 변혁과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소식."

아... 그러나, 이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가? 상황에 따른 해석들이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 가 상대편이 갖고 있는 질문과 상황에서 "복" 이되는 "메시지," 즉 "복음" 이 되도록 설명하는건 쉽지 않다.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한다. 그냥 사영리를 외워서만 해결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도움이 되지만).

유대인을 상대로 했던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나라"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헬라인을 대상으로 했던 바울의 서신서에는 "하나님나라" 얘기가 거의 안나오고 대신 "구원" 과 "의" 에 대한 얘기가 가득하다. 복음이 변질되서인가? 아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학을 공부해야 되나? 무슨 소리. 이런건 신학교에서 가르쳐주지 못한다. 섣부르게 신학배워 교만하게 설교하기 시작하면 관계성은 오히려 깨진다. 예수께서도 하지 않으신 선생질이라니?

일단, 우리의 메시지가 답을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자. 전통에 닿아있는 신앙이 현대의 빠른 상황에서 나오는 다양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다 갖고 있으랴? 아는 것 만큼만 얘기하고 나누면 된다. 모르는건 곰곰 생각해보자. 그리고 자료를 찾아보자 (인터넷에 얼마나 좋은 얘기들이 많은지.. 김학철 교수나 김기석 목사님의 유튜브 만 해도 답이 꽤 많다).

섣부른 단정과 정죄보다. 겸손함과 인내함이 훨씬 더 중요하다. 관계에서 필요한건, 논리와 답이 아니라, 존중과 겸손이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 2B).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 15).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무관심한 세상의 욕심과 사상을 미디아로 쏟아지듯 듣게 된다. 교회를 떠나 있을 때 처음에는 유튜브나 책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겠지만... 관계가 없는 말씀의 전달은 결국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

한두 사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건, 너무나 귀한 일이다. 예수께서도 하신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가졌던 작은 복음이 커진다.

3. 교회를 함께 찾자.

물론 이단이나 편협한 관점을 가진 교회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 일을 해야 하지만. 사람마다 맞는 "교회"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가 꼭 그 맞는 교회가 아닐 가능성도 크다.

막상 교회를 찾아보라. 교회가 얼마나 일률화 되어있는지를 깨닫게 될게다. 다양성이 실종되었다! 교회들이 타겟하고 선호하는 그룹은 중년 주류 중산층들이다. 또 교회가 복음에 얼마나 필요없는 짐을 성도들에게 얹히는지를 보게 될게다. 교회를 다니려면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십일조는 더이상 좋은 전통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되었다. 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복음의 단편 만을 얘기하는지도 볼 수 있다. 근본주의 신학에 매여, 과거 얘기 만을 하거나, 개인영성 만을 강조한다. 삶이 실종된 복음. 찾아보라... 정말 갈만한 교회가 많이 없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예수를 여전히 중심에 둔 교회. 숨어있는 교회. 부족하지만 진리를 찾으려는 목회자들이 없는게 아니다. 일단, 웹싸이트에서 시작하자. 들어가보길. 그리고 설교와 예배를 보며, 생각하는 친구들과 맞는지를 상상해보라.

당연히 기도도 필요하다. 기도를 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치뤄야 할 시간의 값도 치뤄야 한다. 시간내서 찾아보자. 그리고 함께 다니자. 일정 기간이라도. 발견할 때까지. 찾을 때까지. 찾은 다음, 같이 머물러도 좋겠다. 이게 미션얼 아니던가?

또 크리스챤 캠프와 수련회도 찾아보자. 드디어 올 여름부터는 대중 집회가 시작된다. 괜챦은 곳. 맞는데가 있다면 같이 가도 좋겠다.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대학생 선교단체들의 웹싸이트도 뒤져봐도 좋겠다.

4. 소망을 위해서 기도한다.

주께서 맞긴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만나고 돕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이다. 기도하며,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자. 지혜를 구하자.

결국 사람이 변화되는건 하나님의 주권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했던 이들은 비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 가장 실망스러운건 가까운 이들이었고,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를 배신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고 복음을 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도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사람들에 대한 소망이 살아난다. 주님의 주권과 통치를 다시 믿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른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교회중심주의." "교회성장운동" 시대가 북미와 한국 교회를 이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들을 교회로 불렀다. 그리고 사람들은 왔었다. 그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야한다. 사람들에게 가자면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사랑."

사랑은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다. 사랑은 절대 시간을 요구한다. 새로운 관계이기 보다는, 이미 맺어진 이들과의 깊어진 동행이다. 사랑은 정의상 다수를 향할 수 없기에, 분별과 선택이 요구된다. 사랑은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계다. 사랑의 대상은 전도대상자가 아니라, 친구이다. 결국 그 사랑이 교회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기에 이뤄지는 사랑의 관계. 그게 교회다.

어떤 사랑인가? 그들이 참 사랑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길 원함이다. 그러자면,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 공동체는 다름 아닌 우리들이다. 즉 우리가 변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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